유심한 마음 한 자락
유숙자
새해를 맞은 지 몇 달이 지났다.
몇 년 전만 해도 해가 바뀔 때면 계획을 세우고 지키려 노력했으나 근래에는 무계획을 계획으로 세워 놓았다. 우선 마음 편해서 좋다. 올해에는– 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워봐도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생각과 달리 작심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스트레스만 쌓여 그 범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뭘 이루려 해도 도와주시는 분의 은혜가 아니면 소용없음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에 마음이나마 평안을 주고 싶다. 하루 단위로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살아가니 크게 실망할 것도 없고 오히려 충실히 보낸 어느 하루에 감사한다.
계획이 없다고 무의미하게 세월을 보낸다는 뜻이 아니다. 집착하지 않고 무엇이나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싶다는 의미다. 계획은 없어도 유심한 마음 한 자락은 담고 있다. “속 사람은 겉 사람도 사랑해”이다. 생활과 늘 함께 가는 생각이기에 계획 이상으로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인근에 한국마켓이 들어와 생활하기 편해졌다. 전에는 한국 식품을 사려면 LA까지 가야 했으나 집에서 1마일 거리이니 고맙기 그지없다. 한 가지 무심해지는 것은 가까워서 입던 옷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서게 됨이다.
그런 날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민망하기 짝이 없으나 요행을 바라며 모자를 눌러 쓴다. 여자 나이 이순을 넘기면 화장 하나마나란다. 말은 그리해도 어찌 조금 정성을 들인 것과 민얼굴이 같단 말인가. 젊음이 한 몫이여 빛나던 시절에는 갓 씻어 놓은 배추 줄기 같다느니 하는 소리도 들었으나 이제는 정작 꾸며야 할 나이인데도 무신경함에 더하여 게으름까지 피우는 것이 모를 일이다.
적당히 풀어져 살던 나에게 드디어 한 사건이 발생했다. LA 가정법률상담소 일을 도울 때 몇 번 자리를 함께했던 A 부인을 어느 늦은 저녁 마켓에서 만났다. 평소 수수하기 이를 데 없던 그 부인이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숄까지 곁들여 성장한 모습이다. 남편과 함께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라며 반색을 한다. 그날 따라 A 부인은 우리 집 온 가족의 안부를 차례로 물었다. 일면식도 없는 작은아들 내외까지. 나는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 벌에 쏘인 사람같이 허둥대며 마켓을 빠져나왔다.
단정함은 또 다른 교양을 의미함인데 그날 나는 그렇지 못했다. A 부인은 나를 만나면 “언제 봐도 참으로 깔끔하셔요.” 하고 인사를 했다. 그날 이후 A 부인의 뇌리 속에 예전의 내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을까.
긴장하며 살기로 했다. 나이 들며 매사 대충 넘어가려는 자신에게 경계경보를 내렸다. 너그러운 것과 게으른 것은 판이하기에 느슨해지려 할 때는 단정한 모습을 잃지 않으셨던 어머니를 생각했다.
10여 년 전쯤에도 이처럼 민망했던 적이 있었다. 온열 기라는 물건이 들어와 그 효능을 체험케 해준다고 보급소마다 선전이 한창일 때다.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고 있는 나에게 그곳을 다녀온 많은 사람이 만병통치라는 그 기계를 소개했다.
“40여 분 동안 누워 있으면 전신을 골고루 스치며 뜨끈뜨끈하게 마사지해주고-” 하며 저마다 선전원들이 되어 열을 올린다
어느 토요일, 그날 따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종일 누워있었다. 남편은 이참에 그 만병통치라는 온열 기에 몸을 한 번 맡겨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 호기심이 일던 터라 솔깃하여 집에서 입던 옷에 재킷만 걸치고 따라나섰다. 거울에 슬쩍 비친 내 모습이 부스스했다. 시간을 잘 맞춰왔는지 온열기 점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 방문이기에 그곳 형식에 따라 몇 가지를 적고 있는데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그중에 낯익은 사람이 있었다. 그도 나를 알아본 것 같다.
“어머, 아무게 어머니 아니세요?” 큰아이 초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인 이 선생이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이민 와서 그라나다 힐즈에 사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20년만인데 정면으로 대하기가 면괴스러웠다. 하필이면 이런 몰골로 있을 때 만나게 되다니.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가려 주춤거리는데 안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온열 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위기는 모면했으나 온열 기에 누워 있는 내 몸은 형틀에 묶여 있는 기분이었다. 기계는 아직 작동도 하지 않았는데 전신이 후끈거렸다.
“혼자 있을 때 만인 환시(萬人環視)리에 하듯 행동하라.” 이 말을 알고 있는데도 행동은 때때로 생각 속에 규범을 쉽게 배반하는 것 같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수신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다. 1남 3녀를 두셨으니 딸들의 몸가짐, 마음가짐에 늘 세심하셨다. 단정한 외모는 물론이려니와 보이지 않는 것에 더 신경을 쓰라 하셨다. 살아가며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사고를 당하게 될 때 옷을 벗어야 할 것을 대비해서 속옷을 단정히 하라 강조하셨다. 표현을 속옷이라 하셨지만, 우리의 내면에 더 치중하라는 말씀이셨으리라. 외모는 얼마든지 꾸밈이 가능하나 향기처럼 풍기는 인격과 교양은 속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우러나는 것이라 하셨다.
몇 번의 실수는 몸과 마음의 나태를 벗어 버리라는 경고였다. 결국, 예의를 잃지 않음이란 남에게 보이기에 앞서 단정함이라는 자신에 대한 기본 도리이다. 예의는 사람이 행하여야 할 올바른 예와 도, 즉 정신 상태의 바름을 의미하니까. 내적으로 충실하며 타인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는 태도를 이를 것이다.
건강하게, 단정하게, 진실하게, 즐겁게, 여유 있게, 아름답게, 로맨틱하게, 보람있게, 라는 단어에 유심한 마음 한 자락을 담고 싶다.
높게 올라앉은 하늘이 유리알처럼 청명하다. 그 청명함을 내 마음에 한껏 들여야겠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