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본다
유숙자
아이들이 결혼하고 일가를 이루었는데 아직 가져가지 않은 물건들이 많다. 어렸을 때 찍었던 사진이나 벽에 걸려 있는 그림, 초등학교 시절에 받은 상장과 연필로 쓴 일기장, 여행지에서 산 기념품들. 20여 년 넘게 뿌듯한 마음으로 보물처럼 간직하고 살았는데 각자에게 돌려주려니까 정리한다는 홀가분함보다 쓸쓸함이 앞선다. 깊숙이 두었던 카세트 테이프도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렀다. 음감이 발달해서 몇 번만 함께 부르면 정확하게 따라 불렀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카세트를 세워놓고 녹음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의 어눌한 표현이라든지 흥얼거리며 보채던 잠투정.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고 힘차게 고함치듯 부르던 노래. 형제가 싸우는 소리까지 테이프 속에 고스란히 담아 두었다. 하루같이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기다리느라 성냥 가지로 눈을 버텨가며 나눈 이야기들은 지금 다시 들어도 그때의 상황이 눈에 보이듯 실감 난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모아둔 그 테이프가 40여 개가 넘는다. 녹음한 지 수십 년이 되었으니 질 좋은 새 테이프에 다시 옮겨 나누어주기로 했다. 아이들이 동심으로 돌아가 어렸을 때처럼 즐거워할 것 같다.
새로 편집해서 녹음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녹음된 테이프가 춤을 추듯 손짓하며 세월 저편의 그리움을 길어 올린다.
“흙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 새파란 하늘과 흰 구름 보면 / 가슴이 솜처럼 부풀어 올라 / 즐거워 즐거워 노래 불러요.”
마당 넓었던 화곡동 집에서 아이들과 나란히 잔디에 누워 하늘을 향해 목청 돋우어 불렀던 노래가 튀어나온다. 그때 아이들은 새파란 하늘과 흰 구름을 보며 무엇을 꿈꾸었을까. 그 수준에 맞는 미래를 설계했을까. 잔디에 누우면 왜 이 노래만 부르게 되었을까. 하늘이 보이니까. 아닐 것이다. 아마도 하늘 저편의 먼 나라에 출장 중인 아빠가 돌아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이었기에 그리움의 다른 표현으로 이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더듬으면 즐거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온 정성을 다한 것 같았는데 세월을 지내놓고 보니 더 잘해 줄 수 있었는 데, 하는 후회가 남는다. 자식이 장성하면 집을 떠난다는 것, 둥지를 찾아 아주 떠난다는 것을 그때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냥 함께 뒹굴고 언제까지나 이 세월이 있을 것 같아 좋기만 했다.
녹음하는데 거의 한 달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20대에서 30대 후반까지의 젊음을 한껏 누리며 아이들의 유년 시절로 돌아가 함께 지냈다. 지나간 시간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머물고 싶은 행복감에 촉촉이 젖어들었다.
가장 감동을 준 테이프는 나의 39회 생일날 녹음된 것이다. 생애에 더할 수 없이 감격스러웠던 생일 축하 노래가 담긴 테이프.
그날은 친구들의 주선으로 교외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생일 오찬을 나누었다. 저녁나절에 돌아와 집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누나가 아이들의 당부를 전해 주었다.
"아줌마, 아이들이 엄마 오시면 방에 들어오지 말래요. 들어오시라고 할 때까지."
나는 의아해서 누나를 쳐다보았으나 아이들이 문을 잠그고 있어 모른다고 고개를 젓는다. 한 30여 분쯤 지났을까, 아이들이 나를 불렀다. 방문을 열었다. 전등이 꺼져 있었다.
그때 내 눈에 보인 것은 케이크 모양의 타원형 카스텔라였다. 커다란 접시 위에 자그마한 카스텔라가 놓여있고 둘레에 인디언 밥이라고 하는 콘플레이크를 뿌려 놓았다. 케이크 접시 양옆에 사이다병을 세우고 굵고 긴 양초를 켜놓아 촛불이 너울거리며 타고 있었다. 아이들이 색종이 오린 것을 내게 뿌리며 손뼉을 쳤다. 작은아이가 카세트 버튼을 눌렀다.
"엄마, 생일 축하해요."
형제가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다. 어디서 봤을까? 서양 사람들이나 한다는 Surprise Party를 해준 것이다. 색종이로 고리를 만들어 방문 앞에 발을 늘인 것을 보니 시간과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엄마, 카스텔라는 형이 사고 인디언 밥은 내가 샀어. 초는 집에 있었던 거구."
작은아이가 신이나서 떠들었다. 엄마가 놀라는 것이 아주 즐거운 모양이다. 아빠 대신 두 아들이 마련해준 생일 케이크이었다.
나는 양팔에 아이들을 끌어안고 번갈아 볼을 비비며 고마워했다. 콧마루가 시큰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케이크를 잘라 입속에 넣었으나 목이 꽉 막혀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다. 그날의 눈물 어린 케이크가 이 세상 어느 유명한 제과점에서 만든 것보다 더 맛이 있었다. 내 기억 속에 가장 귀하고 감격스러웠던 생일 선물로 아름답게 남아 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작은아이가 2학년 때의 일이다.
삶을 뒤돌아보면 아이들과 나는 남다르게 살지 않았나 싶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라기보다 친구처럼 함께 어울렸다. 매사를 같이 의논하고 계획할 만큼, 아이들은 현명하고 영리했으며 나는 철이 좀 덜 들었던 것 같다. 남편이 오랜 세월 집을 비운 상태였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따스한 벽난로와도 같이 온화한 온기로 보듬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늘 아빠의 사랑을 목말라 하면서도, 아이들은 착하게 잘 자라 주었다.
아이들이 자주 하는 말 가운데 자신들은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늘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책을 읽고 함께 토론의 시간을 가졌던 것,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 일과를 반성하는 일,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 그 시간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9월생인 형제의 34,32세 생일 축하선물로 새로 녹음한 테이프를 주었다. 응당 엄마의 자상한 배려에 감격하여 눈물이라도 글썽거릴 줄 알았다. 그런데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한 개를 듣더니 형제가 함께 "오! 노-." 더는 듣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친다. 저희와 함께 지냈던 옛날이 그리워 눈물을 글썽이며 준비한 테이프가 쑥스럽고 창피한 모양이다.
"형, 엄마가 정말 늙으셨나 봐, 이 테이프를 다시 들으며 눈물이 났데-.”
아직은 젊게 보이는 엄마가 기억에도 희미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말에 혼란이 오는 것 같다. 아이들은 이미 그 시절 내 모습만큼 30대 중반의 어른으로 장성했고, 아이를 가졌다면 자신들의 어린 시절의 모습 같은 아이들의 아빠가 되어 있을 터이니.
아이들과 함께 지냈던 지나간 세월의 한순간이 너무 소중해서 부모는 가슴에 그 세월만을 담고 사는 가보다.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다. 그중에서도 아이들과 함께한 추억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으랴. 내 기억 속에서만 자라는 꽃, 그리움으로 언제나 내 마음속에 살아있기에 날이 갈수록 더 영롱하고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것이다. 아이들도 내 흉내를 내며 자기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그들 모르게 녹음기에 담아두리라.
우울한 날에는 하늘을 본다. 그 푸른 캔버스에는 아이들의 유년시절과 내 젊은 시절이 곱게 그려져 있기에 아이들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나는 오래오래 하늘을 바라본다.(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