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버리 하우스에서
유숙자
살아가며 매일매일 겪는 많은 일은 거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 경험은 때로 교훈이 되고 자기 성찰을 하는 좋은 기회도 된다. 사람들은 흔히 “첫인상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한다. 첫 인상이 좋으면 그만큼 수월해진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는 어디서나 존립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았던 친절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세월이 흘렀어도 잊히지 않는 일. 마치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미담은 오늘처럼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리는 런던에서 꽃피었다.
젊었던 시절, 1년여의 장기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남편이 검은색 버버리 코트를 선물해 주었다. 후랑크후르트를 떠나며 선물을 생각하던 중 마침 버버리 하우스가 눈에 띄어 마련했다고 한다. 평소에 갖고싶어 하던 것이었는데 남편이 내 마음을 알고 선물한 것이 무척 기뻤다. 역시 부부는 눈빛만 봐도 아는구나 생각하며 남편의 센스에 감탄했다. 그 기쁨도 잠시 옷을 입어본 순간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1년 만에 귀국했다 할지라도 아내의 사이즈를 잊었을 리 없을 텐데 그 옷은 내게 너무 컸다. 몇 번이나 고쳐 입으려 했으나 선뜻 손 내밀어 고쳐주겠다고 하는 곳이 없어 옷장에 장식품처럼 걸려 있었다. 몇 해 후, 우리 가족이 영국으로 발령을 받고 짐을 꾸릴 때 대충 싼 짐 속에 예의 그 버버리도 함께 넣었다.
시도 때도 없이 안개비가 내리는 영국에서 버버리는 사계절을 두루 입는 사랑 받는 옷이다. 봄비가 차분히 내리던 어느 날, 런던으로 외출할 일이 있어 준비하다가 버버리가 생각났다. 이참에 고쳐 입던지 한 벌 장만하든지 하려고 헤이마켓(Hey market) 거리에 있는 버버리 본점엘 갔다. 비가 오는 날이라 더 필요했는지 그곳에는 관광객 차림의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한쪽 귀퉁이 의자에 앉아 누군가 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매니저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다가와 도와줄 일을 물었다. 나는 가지고 간 코트를 보여주며 3년 전 독일에서 샀는데 너무 커서 입을 수가 없다는 말을 했다.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안감에 붙어있는 상표를 확인했다. 직원들만 아는 어떤 표시가 있는 것 같았다.
“이 코트는 이곳에서 만들어 국외로 보낸 제품입니다. 맞는 사이즈로 바꾸어 드릴게요.” 그녀는 앞장서며 진열대로 안내해 주었다.
몇 년이나 옷장에 걸려 있는 동안 이리저리 휘둘려 이미 새 상품의 가치가 떨어져 보이는 코트였는데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선선히 바꾸어 준다니 고맙고도 미안했다. 입혀주는 대로 수도 없이 입어보다가 나에게 가장 잘 맞고 어울린다는 연 베이지색 코트를 골라 주었다. 홀 안에 많은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꼼꼼하게 챙겨 주었다. 가슴이 꽉 차오르는 뿌듯한 마음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나는 버버리 코트의 깃을 올려세운 뒤 봄비 내리는 거리를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벌써 25년 전의 일이다. 요즈음은 그런 관행에 익숙해져 당연히 그러려니 하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가 살던 곳에서는 한번 산 물건을 바꾸어 받는다는 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때였다. 그런 경직된 관행에 길들여 살다가 갑자기 전혀 기대 이상의 일을 겪고 나니 감격 그 자체였다.
오래전부터 상표명이라기보다 레인코트의 대명사로 쓰였던 버버리. 디자인과 색상이 거의 변함 없고 제품의 질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세계 각국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것 같다. 긴 세월 동안 전통을 지키며 고객에 대한 한결같은 서비스로 그런 명성을 얻게 된 것이 아닐까. 그저 부러움, 부끄러움, 일종의 시기심마저 스친다.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런 사소 하나 유쾌한 감정을 자아내는 접촉의 누적이 바로 문명사회니 선진이니 하는 말들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조용히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살아가면서 남들이 사람들과의 일로 불쾌한 일을 겪는 것을 보거나 들을 때, 나 자신이 간혹 불유쾌한 일을 겪을 때마다 오래전 있었던 그 일이 떠오르고 교훈을 얻는다. 아마도 그들은 영국의 전통과 자존심, 친절도 함께 상품화하고 있는 것 같다. 철저한 상도덕에 임한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온정성을 쏟는 노력이 외경스럽기까지 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옛 영화가 거저 된 것만은 아님도 생각하게 된다.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