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노래

                                                                                                                                                             유숙자

공연을 마친 후, 텅 빈 객석을 바라볼 때의 허탈감을 무대에 서 본 사람은 안다. 더욱이 그 공연이 마지막 날의 밤 공연쯤 되면 강도가 더 심하다. 온 힘을 다해 연습해 온 만큼 효과를 얻었어도 아쉬움이 남고, 오랜 시간 쏟아부은 열정의 결과가 만족지 못했을 때는 춤사위를 던지고 싶은 심정이다. 오늘까지 따라다녔던 경력이라든지 명성은 아무 소용 없다. 한순간의 실수도 허용치 않는다.

 

발레는 하루를 쉬면 자신이 알고, 이틀을 쉬면 비평가가 알고 사흘을 쉬면 관객이 안다는 예술이다. 육체 언어에 문법을 구사하는 무대 예술이 발레다. 긴 세월 동안 수없이 반복한 공연일지라도 언제나 처음 서는 무대같이 떨리고 조심스럽다. 첫 공연이 끝나고 난 그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다음 날 아침, 신문의 평론을 대하기 전까지 좌불안석이다.

 

그녀가 “빈사의 백조”로 데뷔할 당시 평론가들은 ‘죽기 전에 날아 보려고 애쓰는 처연한 연기력에 서정적인 영상미가 스며들어, 육체가 도달할 수 있는 미의 최고 경지를 보여 주었다’고 평했다. 그것은 천부적으로 발레를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신체 조건에 끊임없는 노력이 더해진 때문이다. 오직 발레를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고 살아 있는 한 발레와 하나 되기 원했던 집념의 다른 표현이 그런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죽어가는 백조가 생명의 원초적 본능을 손과 팔을 통한 날개의 움직임으로 표현해야 하는 처절함이 그녀와 잘 맞았다.

 

공연 때마다 거의 그렇듯 이번에도 발톱이 두 개가 곰겨 있어 토슈즈를 신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웠으나 이제는 토슈즈 때문에 발이 상할 염려도 없고 더 이상의 고통도 주어지지 않을 것으로 괴로워하는 아이러니 속에 빠져 있다. 그녀는 “지젤” 공연을 끝으로 무대를 떠난다. 오늘 밤, 마지막 공연을 그녀가 좋아하는 작품으로 장식하게 된 것을 위로라 생각하면서.

 

2막으로 구성된 “지젤”은 발레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찬사가 끊이지 않는 로맨틱 발레의 대표작이다. 발레리나의 정교한 테크닉과 연기가 동시에 창출되는 작품으로 프랑스의 작가 고띠에가 하이네의 전설 중에서 “빌리”에 관한 부분을 읽다가 영감을 얻어 지젤을 착상했다.

 

공작 알브레히트는 로이스라는 가명의 농부로 변장한 후, 지젤을 찾아와 사랑을 약속한다. 귀족인 줄도 모르고 사랑에 빠진 지젤은 로이스의 약혼녀가 바틸데 공주라는 말을 듣고 충격으로 미쳐서 자살한다. 죽는 순간 자기 앞에 무릎을 꿁은 알브레히트를 용서한다. 지젤의 무덤이 있는 숲 속 연못가에 알브레히트가 찾아온다. 빌리의 여왕 미르타는 지젤을 무덤에서 불러낸 후 알브레히트와 춤을 추어 죽음에 이르도록 요구한다. 지젤은 그를 사랑하기에 살려줄 것을 애원하지만 미르타는 듣지 않는다. 이때 먼동이 튼다. 빌리 들은 기운을 잃고 물러가고 지젤은 알브레히트에게 작별을 고하고 자신의 묘혈 속으로 들어간다. 지젤의 사랑이 그를 구한 것이다.

 

그녀는 지젤을 춤추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픔, 지젤의 영혼을 덧입고 춤에 몰입한 이유도 있겠으나 외로운 예술가의 궤적을 따라 사랑도 희생시켜가며 힘들게 택한 예술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것이 그녀를 죽음 같은 절망으로 빠져들게 했다.

 

시간과 공간 예술인 발레야 말로 현실과 이상을 한 무대에 조화롭게 결합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닌가. 발레리나를 꿈꾸며 무용을 시작한 어린 나이부터 그녀는 발레에 취해서 살았다. 발레가 곧 삶이었다. 발의 통증이 심해도 토슈즈만 신으면 무아의 경지였다. 마치 꽃 속을 나는 나비같이 몸이 가벼웠다. 분홍신의 소녀같이 무대에서 춤추다 죽는다면 더할 수 없이 행복하리라.

 

진로가 결정되었다. 큰 무대를 꿈꾸며 발을 옮기려고 준비하고 실천 단계에 이르렀을 때 삶의 변화가 왔다. 더는 발레를 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고 환경의 지배를 받고 말았다. 벼랑 끝에 서서 떨어질 것 같은 심정으로 아무것에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버려야 하는 것에 대한 미련으로 불면의 긴 밤이 이어졌다. 비바람 치는 거리에 내동댕이쳐졌다.

 

사랑을 품어야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으나 때로는 사랑을 접고 외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 발레리나의 삶이다. 1950년대, 아직은 발레가 황무지나 다름없는 이 나라에서 발레를 보급하고 그 진수를 보이는 것이 발레리노와 발레리나의 사명이었다. 음악과 무용과 이야기의 전개가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 예술인 발레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펼쳐 보이고 싶었다. 살아가며 어떠한 여건이 오더라도 생명을 접을지언정 발레만큼은 포기할 수 없으리라 했던 결심이 현실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발톱이 곰길 때마다 살코기로 너비아니를 떠서 발가락을 싸 주시던 어머니도 이제 할 일을 잃으셨으리라.

 

지나간 세월이 스크린처럼 흐른다. 다섯 살 때부터 동네 어른들 앞에서 춤추던 창작 무용.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노래만 불러주면 어디서나 몸을 움직였다. 녹음해 둔 음악테이프가 끊겨 춤추다 무대 뒤로 사라져야 했던 일. 콩쿠르를 앞두고 길든 토슈즈를 잃어버려 당황했던 일. 열광하는 청중들의 커튼콜로 황홀했던 일. 공연 일정이 끝나는 저녁이면 어김없이 배달되던 흰 장미. 크고 작은 공연 때마다 흥분과 떨림이 혼합되어 처음 서 보는 무대인 양 번번이 새롭기만 했던 지난날들----. 삶과 무용이 일체를 이루던 시간이 다시 내게 주어질 수 없는 현실 앞에 무기력하게 서 있는 내가 싫었다. 프리메이슨 회관 신축기념 공연 칸타타 “우리들의 기쁨을 널리 알리소서”를 연습하는 지휘 도중 과로로 쓰러진 모차르트가 더 할 수 없이 부럽고 행복하게 여겨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접으며 그녀는 마지막 화장을 천천히 지우고 있다. 무대로 나왔다. 좀 전까지 열기로 가득하던 공연장이 심연처럼 고요하다. 관객도 출연자도 없는 빈 무대에서 그녀는 “빈사의 백조”를 춤춘다. 생상스의 음악 “백조”가 귓가에 환청처럼 어린다.

 

어린 시절 데뷔 때, 그녀를 황홀하게 만들어 준 찬사와 박수가 우룃 소리 같이 들린다. 그녀의 발레 세계를 아는 사람들은 가장 신비롭고 처절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던 발레가 “빈사의 백조”라고 평했다.

조명처럼 내리는 고요 속에 안타깝게 깃을 떨고 있다. 멜로디를 따라 허밍 하며 춤춘다. 그녀가 부르는 백조의 노래는 차츰 숨죽인 흐느낌으로 길게 가늘게 이어졌다가 끊기며 여운처럼 다시 이어진다. 이제 백조는 깃털을 내리고 차분히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기다린다. 그리움과 갈망의 파도를 타고 꿈처럼 아름답게 간직되었던 날. 그녀는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빈사의 백조”처럼 안타깝게 깃을 떨고 있다.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