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여행

                                                                                                                                                               유숙자

영국에서 살았던 5년은 신이 내게 주신 보너스라고 생각한다.

남편의 근무지가 주로 외국이어서 우리 가족은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다. 늘 기다림 속에 그리움이 쌓인 것이 나의 30대 삶의 전부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다니며 근무했던 남편은 일 때문에 바빠서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었겠으나 나는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밤이면 무서워 떨며 지낸 세월이었다.

 

남편이 유럽에 있을 때, 근무하던 도시나 출장지에서 자주 엽서를 보내 주었다. 자신이 거쳐 간 도시들을 언젠가는 가족과 함께 여행할 것이라는 사연을 담아서-. 긴 세월 동안 보내온 엽서는 상자 가득 쌓여 갔다. 그 바람이 이루어져 1980년 우리 가족은 영국으로 가게 되었고 오랜만에 이산가족이 합치게 되었다. 그곳에서 지냈던 하루하루는 매 순간을 느끼며 살고 체험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꽉 찬 생활이었다. 여행하면서 예전에 책으로만 습득했던 유럽의 문화와 유적을 현장학습을 할 수 있었다.

 

제1화

영국에 도착하고 이틀 후, 가장 먼저 찾아갔던 곳이 워털루 브리지였다. 너무도 강하게 비극으로 남아있는 추억의 명화 “애수”의 산실. 제 1차 세계대전의 회오리에 사랑을 잃고 영락의 길을 걸었던 비운의 발레리나 마이라의 비애가 그 다리에 서려 있었다.  

'Candle light club'에서 촛불이 하나하나 꺼지며, 이별의 왈츠 “올드 랭 자인”에 감기듯 춤추던 아름다운 발레리나는 아직도 내 환영 속에서 춤추고 있다.

 

마이라는 친구들에게 결혼을 발표하고 축하받으며 행복에 젖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전선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로이의 전화를 받는다. 결혼 전날 발생한 이 일은 마이라에게 너무 큰 충격이어서 곧 막이 오르는 무대를 외면한 체 정신없이 워털루 역으로 향한다. 그 일로 발레단에서 쫓겨난다.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 신문 전사자 명단에서 로이의 이름을 발견하고 실의에 빠져 거리의 여자로 전락한다. 안개가 유난히 짙게 낀 날, 손님을 찾아 워털루 브리지를 서성이던 마이라는 죽은 줄 알았던 로이를 만나게 된다. 로이는 전사한 것이 아니라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마이라는 자신의 과거를 속이고 로이의 시골 저택에서 결혼 준비를 하고 있으나 저지른 잘못 때문에 다시 찾아온 행운이 불안하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 가문이 부끄러워할 행동을 할 사람이 절대 아닐 줄 안다”는 문중 어른의 자랑스러운 격려가 채찍으로 꽂혀 워털루 브리지에서 싹튼 사랑은 그곳에서 진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노 장교 로이는 어둠에 잠겨 있는 워털루 브리지를 다시 찾는다. 불안스럽게 퍼져있는 검은 구름이 하늘에 낮게 드리워져 있고 묵묵히 흐르는 템즈 강이 예전과 변함없이 그를 맞아준다. 로이는 죽은 발레리나 마이라가 남기고 간 “Good Luck Charm”을 품속에서 꺼내며 처연한 그리움에 잠긴다. 그의 귓가에 마이라의 음성이 들린다.

“이 마스코트는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것 덕분에 먼 훗날에도 나를 기억하게 되겠지요.”

“당신을 기억할 것 입니다. 내 삶이 끝날 때까지-.” 절절한 로이의 고백이 흐르는 강물에 섞인다.

 

중학생 때, 이 영화를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마치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애절한 사랑이 가슴 아파 울고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마이라가 불쌍해서 울었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 방금 헤어진 로이가 다시 찾아와 우산이 젖혀진 줄도 모르며 키스하던 그들의 사랑이 아름다워 울었다. 결혼이 설렘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마이라를 보고 울었다. 워털루 브리지에서 주운 사랑을 그곳에서 잃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처지가 딱해서 울었다.

 

사랑은 비극으로 끝이 나야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것일까.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결코 빛바랠 수 없는 한 폭의 수채화같이-. 그들의 비극적 사랑이 지금까지도 세인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더 아름다운 것인가 보다.

 

제2화

눈이 부시게 푸른 5월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났다.

요크셔 지방의 황량한 벌판 하워즈 무어. 사철 세찬 바람으로 건물의 벽면이 모두 검게 그을려 있어 분위기마저 음산하고 쓸쓸한 곳이다. 겨울이면 폭설과 눈보라가 심하여 종종 길을 잃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나 봄이오면 보랏빛 헤더(Heather) 꽃이 벌판 가득히 물결쳐 애잔한 향기가 은은하다.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있는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이다.

 

요크셔 농장의 주인인 언쇼씨는 리버풀에 갔다가 히스클리프를 주어 왔다. 언쇼씨는 자신의 아이 캐서린, 힌들리와 함께 히스클리프를 친자식처럼 키웠다. 언쇼가 죽자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마구간으로 내쫓고 갖은 학대를 한다. 그의 고통을 알고 위로해 주는 사람은 캐서린이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사랑하기에 힌들리의 모진 학대를 참고 견딘다. 그 사랑은 집념과 광기에 가깝다. 폭풍의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같이 감정적이며, 불꽃 같은 열정으로 애증 섞인 특이한 사랑이다.

 

캐서린이 유복한 지주의 아들 에드거와 결혼한 것은 일종의 탈출이었다. 히스클리프 를 사랑하지만, 지옥 같은 힌들리의 집에서 빠져나오려고 에드거 린튼의 구혼을 받아 들였다. 캐서린이 결혼한 에드가는 부유한 집에서 밝게 자랐고 유머가 풍부하며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다. 캐서린은 이런 에드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결혼했다.

 

기실 캐서린에 있어서 히스클리프는 그녀의 본질이다. 영혼이 같은 그녀 자신이다. 히스클리프와 결혼하게 되면 “자신의 신분이 떨어진다”고 한 말은 생각이고 “나는 곧 히스클리프”라고 한 말은 그녀 영혼의 부르짖음인 것이다. 몇 년간 종적을 감추었던 히스클리프가 다시 나타나면서 그녀는 갈등과 괴로움으로 번민한다. 남편의 극진한 보살핌도 그녀의 근본적 고뇌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녀는 결국 피지 못하고 시드는 꽃 같이 죽어 간다. 그녀가 죽고 난 후에야 “이제는 나의 여인”이라고 외치는 히스클리프의 절규는 사랑의 신을 향해 올리는 간절한 기도처럼 순백하다.

 

3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에밀리 브론테의 29세 때 작품 폭풍의 언덕은 죽음까지도 따라간 가장 슬프고 애절한 사랑이다. 결국, 작가가 이같이 파격적인 작품을 쓰게 된 동기는 세상 것의 집착과 영원에의 사랑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서 몸서리쳐지는 처절한 사랑을 체험하고 캐서린처럼 짧은 생애를 마쳤다. 지금은 브론테 기념관을 만들어 그 당시 집필하며 사용했던 펜이며 책, 의류, 장신구 등 유품을 전시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세찬 바람은 여전하고 기념관 앞에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로 언제나 긴 줄이 이어진다. 적막 그대로의 고요한 침묵이 흐른다.

 

제3화

영국 도버에서 프랑스의 깔래까지는 “호버크라프트”로 50여분 가량 걸린다. 유럽으로 향하는 여행객들이 이 배에 차를 싣고 갈 수 있어 많이 이용한다. 나도 바다 건너에 사는 친구가 그리울 때면 곧잘 이 배를 타고 대륙으로 향한다.

당시 친구가 독일에서 살았다. 여학교 때부터 절친했던 사이로, 만나면 끝없는 공상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부풀렸다. 장성하여 친구는 독일에 체류 중인 사람을 만나 결혼했고 자신의 전공분야도 살려가며 보람을 쌓고 있었다.

 

반면에 유럽 무대를 꿈꾸며 발레리나로 한 생을 살고 싶어 하던 나의 열망은 꿈으로 머물렀다. 결혼과 더불어 생활이라는 평범한 일상 속에 안주하면서도 가끔 이루지 못한 것들이 한으로 남아 세월이 버리고 간 시간 속에서 유영하고 있었다. 그때 친구와 다시 만남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더 깊은 가슴을 열어 추억을 길어 올리며 잠자던 가슴의 고동을 되살아나게 했다.

친구가 사는 하이델베르크는 찾을 때마다 나를 감동케 했다. 비 오는 날 더 운치가 있다는 하이델베르크는 친구의 말에 맞추려는 듯, 갈 때마다 젖은 공기 같은 비가 내렸다.

 

우리가 본 넥카 강은 뿌연 안개가 내리 덮여 있었고 안개비의 여린 빗줄기가 몸속까지 퍼져 드는 촉촉한 오후였다. 하이델베르크 성 허리를 감도는 물안개는 사랑을 태우는 연기 같아 신비로웠다. 안개비가 내리는 날이면 높게 솟아 있는 웅장한 성 모습이 형태가 변하는 물안개의 변화에 따라 전설 속으로 아득히 멀어져 갔다. 그곳엔 알지 못할 서기가 어려 있었다.

옛날 이 성의 황태자가 마을에 사는 여인을 사랑하여 밤이면 몰래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계급제도가 엄격했던 당시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일탈이었으나 사랑의 힘이 행동하게 하였다. 그때 생겼다는 깊숙이 패인 두 발자국은 여행객들에게 꿈을 심어 준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이 성을 찾는 여행객들이 그 패인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맞추면 다시 찾아오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호기심으로 한 번씩 발을 맞추어 보는 그 발자국에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빗물이 비밀스럽게 고여 있다. 이 전설과 하이델베르크 성은 너무도 멋지게 어울려 내가 친구에게 갈 때마다 그 성을 찾곤 했다.

 

생전 처음으로 나가 보았던 바깥세계는 모든 것이 새롭고 경이로웠다. 그곳에서는 문화와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세계사를 배우며 동경했던 유럽, 어린 시절 책으로만 섭렵했던 곳을 여행하며 의식 속에 자리했던 생각들을 정리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어 좋았다. 내적으로 충실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 뿌듯했다.

이제 더 큰 세계에서 호흡하고 있는 지금, 꿈처럼 아름답게 간직했던 유럽에서의 생활과 살아온 연륜에 맞는 성숙한 자아가 접목되어 삶 속에서 탐스러운 결실을 볼 수 있도록 자신을 가꾸는 일에 게으름 피지 않으리라.

 

봄바람을 타고 날아와 꽃잎처럼 내 집 앞마당에 살포시 미소 지으며 떨어진 친구의 엽서는 나를 추억의 거리와 유적으로 다시 여행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허리를 휘감아 도는 훈풍이 연초록의 숨결을 느끼게 해서 좋은 이 계절, 오덴발트의 푸른 숲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친구의 유혹적인 속삭임이 아니더라도 세월 속에 묻어둔 추억을 찾아 떠나고 싶다.

그리움이 있기에 다시 가보고 싶은 곳으로-.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