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줄 왼쪽부터, 알리 에사시 연방의원, 권태한 부총영사, 김수영 목사, 도나 켄스필드 전 온타리오 자연자원부장관, 김명숙. 김연수 전 평통 회장 부부, 뒷줄 중앙에 김만홍 목사와 딘 스코필드(스코필드 박사 손자 부부)
65년 잊힌 묘지를 찾아
김수영
고 스코필드 박사는 영국에서 캐나다로 이민 와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하고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토론토 농장에서 알 수없는 피 흘리는 병이 소에게 만연하여 수없는 소가 죽어가도 아무도 그 원인을 찾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스코필드 박사는 연구에 몰두하여 원인을 발견하게 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수의학자가 되었다. 독일에서 영국에서 미국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박사학위를 세 번이나 받아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수의학자뿐 아니라 세균학자이며 병리학자였다.
캐나다에서 모든 명예를 갖고 있던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에서 평생을 대우받으며 후배들을 양성하고 자기 전문 분야에 매진하며 일생을 편안히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선배로 한국의 세브란스 대학 교수로 있던 에비슨 박사의 초청에 응해 세브란스 대학의 세균학 교수로 부임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그는 갓 결혼한 아내 앨리스 스코필드 여사와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스코필드 여사는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피아노 연주 실력도 뛰어났다.
스코필드 박사 부부는 한국에서 3.1 독립운동을 목격하게 되었고 제암리 교회 방화 사건 (교인 29명 불에 타 사망)을 세계에 알렸다. 그리고 일본 군인과 경찰이 독립운동 가담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내용을 영어신문으로 제작해 세계 각국에 전한 우리나라 독립유공자다.
일본 경찰은 외국인이 목숨 걸고 독립운동가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암살을 시도했다. 마침, 그날 스코필드 박사는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약한 아내 앨리스 스코필드 여사는 이 엄청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아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결국 스코필드 박사는 아내와 함께 1921년 캐나다로 돌아갔다.
이후 스코필드 박사는 최선을 다해 아내의 병 간호를 했다. 하지만 아내 엘리스 스코필드 여사는 1959년 고인이 됐다. 그후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을 다시 찾아 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많은 고아를 돌봤다. 그러다보니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 아내 스코필드 여사의 묘소에는 묘비하나 세우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 스코필드 박사의 손자인 딘 스코필드가 묘비가 없는 할머니 묘소를 찾아내었다. 올해 스코필드 재단(Schofield Foundation)을 설립한 김만홍 목사님이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 묘비를 만들어 설치했다. 그리고 지난 5월 11일에 제막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나는 김 목사님의 초청으로 제막식에서 영어 추모사를 했다. 내게는 생전의 스코필드 박사 를 만났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생전에 만난 사람은 나 이외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스코필드 박사의 후손들 조차 책이나 전기나 역사 기록을 통해 그를 알 뿐이었다. 살아생전 생생한 기억을 더듬어 추모사를 시작하자 모두 눈물을 글썽이었다.
내가 한 영으로 쓴 책 ‘잊을 수 없는 스코필드 박사와 에델바이스의 추억’을 20여 권 갖고 가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너무나 좋아했다. 온타리오 주 조성준 시니어 복지부 장관도 행사에 참석 예정이었으나 일정이 생겨 참석하지 못했다. 조 장관은 이튿날 나를 조찬에 초청했고 나는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내가 미국에 도착한 후 조 장관은 두 번이나 전화로 책을 완독했다며 나를 만나러 미국에 한 번 오시겠다고 해 무척 기뻤다.
스코필드 박사 부부도 하늘나라에서 매우 기뻐하리라 믿는다./2024년 5월 31일 /오피니언
스코필드 박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갑니다. 그 박사님이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네요. 그리고 선생님이 그것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계시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