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남조 시인을 추모하면서
김수영
‘시와 사람들’ 동인들이 모여 지난 11월 11일 토요일 저녁에 식당 북경에서 고 김남조 시인의 추모회를 가졌다. 그분의 일생을 조명하면서 그분의 대표작 시 20편도 낭송하는 시간을 가졌고 감회가 매우 깊었다. ‘시와 사람들’을 설립하신 문인귀 선생님은 김남조 시인을 미국에 초빙하여 며칠동안 시에 대한 강의를 들은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고인을 추모하며 기렸다.
나보다 11살이 더 많은 김남조 시인은 내가 서울대학교 영어과 일학년에 재학중일 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전임강사로 발탁이 되어 국어를 교양과목으로 일학년 대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당시 영어과 주임교수로 계시던 고 피천득 교수님은 제자로서 김남조 시인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셨다.
대학교 재학 중 피천득 교수님 댁에 자주 방문하게 되었고 따님 서영이와 두 아드님과도 대면하게 되었다. 유별나게 딸 서영이를 사랑했던 피천득 교수님은 늘말씀하셨다. 시인이 되려면 김남조 시인처럼 시를 쓰는 시인이 되라고 당부를 하셨다.
피천득 교수님이 아끼시던 제자라 나는 유별나게 김남조 시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국어 시간에 강의를 경청하게 되었다. 항상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강의하셨다. 검정 통치마와 흰색 저고리를 입으셨다. 나는 강의 보다도 시인의 단아한 모습에 매료되어 강의 시간 내내 시인님을 쳐다보면서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하였다. 한국여성의 전형적인 현모양처 모습이였다.
한국 여성 시단의 최고 원로이자 ‘사랑의 시인’으로 유명한 김남조 시인이 지난 10월 10일 오전 숙환으로 영면에 들었다. 향년 96세. 시인은 지난 8월 발간된 <우먼센스> 창간 기념 인터뷰 기사를 통해 여전한 현역 시인의 위치에서 끊임없는 창작의 힘으로 사랑과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줘 독자들에게 큰 울림을 준 바 있다. 시인 생의 마지막 인터뷰였다.
고인은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후쿠오카 규슈여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시절인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잔상’을 발표하며 등단한 뒤 1953년 첫 시집 <목숨>을 출판하면서 우리나라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70년 넘게 활동했다.
김남조 시인의 '겨울 바다'는 많은 독자층을 갖고 있다. 특히 서정주 시인이 병원에 입원하고 게실 때 병문안 갔다 오셔서 쓴 시 ‘큰 시인’은 많은 울림을 준다.
큰 시인
김남조
시인의 병실엔
온화한 겨울햇빛이
서로 잘 어울리는
주인과 손님으로 함께 머물고
이승의 시간
열다섯 주야를 남긴
시인의 모습은
애처로이 아름다웠다
선생님…..
비통하게 마음으로만 불렀는데
알아들은 듯 깊이 끄덕이시고
침묵 중에
사람의 할 말이 바수어져
공중에 증발하는
무량적멸이라니
그러다 내가 말했다
시인선집 등의
선생님 작품은 제가 고르겠습니다
그분은 환하게 끄덕이며
나직이 말씀도 한다
육백 편쯤은 되니까……
분량은 넉넉하리란 뜻이다
작별 즈음에
그분의 볼에 내 뺨을 대었다
아주 잠시
그리곤 병실을 나왔다
자부의 말이
오늘이 제일 환하시다 했다
성탄 전야에 영면하시니
수일간의 어수선한 장례절차가
한 장의 얇은 간지로
그 생애의 책갈피에 삽입된 후
시인은 다시 돌아왔다
그리하여
영원히 여기에 살으신다
<한국시> 이 집에
*미당 선생을 마지막 뵙고. 김남조
피천득 교수님도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김남조 시인도 영면하셔서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나는 피천득 교수님의 소원대로 김남조 시인처럼 심금을 울리는 사랑의 시인이 될 수 있을까하고 오늘도 열심히 시를 쓴다.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피천득 교수님과 김남조 시인을 가까이서 보면서 강의를 들으셨네요. 이제 김남조 시인은 사라져 갔지만. 그녀가 남긴 영혼을 울리는 시들은 영원히 우리의 가슴에 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