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에서 마주친 소녀

최 숙희

 

 

밤사이 내린 비로 나뭇가지마다 매달린 빗방울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울창한 숲속에 지그재그로 나있는 트래일을 걷는다. 산에 오를 때 주위에 펼쳐지는 풍광이 좋다. 아득히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 위로 한줄기 구름이 한가롭게 걸려있다. 번개 맞아 검게 탄 고목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있다. 바위틈에 수줍게 피어난 이름 모를 야생화와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다니는 다람쥐와 도마뱀도 정겹다. 일상의 번잡함으로 뒤숭숭하던 머릿속도 나무의 숨결을 느끼며 걷다보면, 아무 일도 아니니 안심하라는 자연의 소리가 들리는듯하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산의 자태는 안식과 치유를 준다. 이른 새벽 포근한 이불의 유혹을 뿌리치고 산에 오기 잘했다. 인적 드문 깊은 산속을 천천히 걷다보면 자연과 미묘한 소통을 하게 되며 깊숙한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자기 성찰의 시간이다. 평생 목발을 집고 살았던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의 남보다 느리게 걷기에 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볼수 있었다.’는 고백은 발걸음이 남보다 느린 나를 위로하곤 했다. 오늘도 일행에서 떨어져 혼자 천천히 걷는 중이었다.

 

 

정상을 향해 올라가던 나는 큰 바위를 사이에 두고 내려오던 그녀와 마주쳤다. 바위가 가려서 그녀의 상체만 볼 수 있었다.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붉은 갈색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의 팔이 날씬하고 보기 좋았다. 같이 온 남자친구와 까르르 웃으며 바위 뒤에서 뭔가 얘기를 하며 떠들고 있었다. 나를 포함하여 내 뒤에 오는 이들이 한동안 기다려야 했다. ‘연애는 하산해서 하지, 요즘 젊은 애들은 자기만 알고 남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하면서 괘씸해하던 중 바위 앞으로 불쑥 내딛는 그녀의 의족을 보았다. 짧은 바지를 입어 무릎부터 검정색의 의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린 나이에 받아들이기 힘든 장애를 갖고도 그늘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밝은 얼굴과 쾌활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녀가 놀랍다. 의족을 하고 험준한 산을 하이킹하며 온 몸으로 긍정의 힘을 보여준다.

 

 

몇 년 전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로 다리 하나를 잃은 무용수 에이드리언이 의족을 착용하고 춤추는 영상에 나왔던 바로 그 의족이다. 매사추세트공과대학의 휴 헤르(Hugh Herr)교수가 만든 생체공학 의족, 일명 스마트 로봇 의족이다. 헤르교수 자신도 1980년대 등반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의족의 도움으로 암벽등반가가된 동시에 전공도 물리학을 택했고 현재는 MIT 미디어랩 생체공학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장애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장애 덕분에 인공 팔과 다리를 연구하여 인류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되었으니 감동이다.

 

 

의족으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보스턴 마라톤 테러 피해자 두 명이 의족 마라토너가 되어 마라톤 완주자가 된 기사가 뜬다. ‘테러와 폭탄은 우리를 꺾을 수 없어요. 우리는 계속 나아가고, 완주합니다!’ 라는 오바마의 트윗도 가슴 뭉클한 것이었다.

 

 

살다보면 예측할 수 없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겠지만 허무하고 절망적인 상황이 와도 불굴의 정신으로 다시 일어나는 인간의 위대함을 본다. 인간 도전의 한계는 어디인가. 산행에서 만난 소녀에게 박수를 보내며, 나태한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