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 허무주의자들을 위한 스페이스 시뮬레이션

 

칼 세이건의 명저 <코스모스>(1980)는 이런 헌사와 함께 시작된다. “앤 드루얀을 위하여. 광대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속에서, 하나의 행성과 하나의 시절을 앤과 공유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다.”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에게 바친 이 헌사를 나는 감동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식의 감동에는 어떤 상투성이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왜 우리는(영화는) 우주를 생각하면(우주로 나아가면) 갑자기 지구에서의 삶에 새삼스러운 애착을 느끼게 되는가. 왜 그 ‘숭고’의 순간에는, 이 행성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주고받는 상처는 모두 뒷전으로 밀려나고, 소중한 사람과 “하나의 행성과 하나의 시절을 공유하는 것”이 그저 아름답게만 느껴지는가. 이런 감정/태도에 ‘스페이스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는 이 단어를 조금 노려본다. <그래비티>도 그런 서사구조의 상투적인 반복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 글의 요점이다. 이 영화는 상투적인 스페이스 휴머니즘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스페이스 니힐리즘과 맞선다. 그리고 그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넘어선다. 단, 내가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는 방식으로.


 

중력은 없고 관성만 있는 삶


 

언젠가 이 지면에 썼듯이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특정한 ‘인물’ (성격)이 특정한 ‘상황’에 던져졌을 때 어떤 특정한 ‘선택’을 하는지를 지켜보는 작업”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모든 것은 성격에서 시작된다. 게다가 <그래비티>는 주동인물의 성격이 반동인물의 성격과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갈등을 동력으로 삼는 유형의 서사가 아니라 주동인물의 내적 갈등을 다루는 유형의 서사이기 때문에, 만약 이 영화가 상투적이지 않고 독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결정적인 동력은 주인공의 성격 그 자체에서 나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라이언 스톤(샌드라 불럭)은 상공 600km 지점에서 1주일째 익스플로러호의 통신 설비를 수리하고 있다. 그녀는 ‘미션 스페셜리스트’(mission specialist)인데, ‘임무 전문가’라는 번역어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뉘앙스와는 달리, 그 직책이 수행하는 업무는 의학실험이나 기술탐사 등의 영역에 제한돼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에게는 진취적인 모험가의 기질 따위는 없어 보이며 오로지 연구원다운 겸손한 집중력으로 묵묵히 자신의 ‘제한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라이언의 성격은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와의 대화 속에서 조금씩 천천히 구축된다. 나사(NASA)에서 일해보니 어떤가 하는 질문에는 그저 연구비 지원이 안정적이어서 좋다는 식으로 답하고, 우주에 와보니 제일 좋은 것이 뭐냐는 질문에는 ‘고요함’(silence)이라고 답하는 식이다. 이들의 대화는, 러시아 위성이 폭발하면서 생긴 잔해가 그들의 우주선과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라이언이 우주 미아가 될 뻔한 고비를 넘긴 뒤에, 다시 이어진다.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북돋우기 위해 맷은 라이언에게 묻는다. 지금 지구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냐고. 없다. 남편도 자식도 없다. 딸이 하나 있었으나 4살 때 사고로 허망하게 죽어버렸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운전 중이었고 그 충격으로 이후 그녀의 삶은 그저 운전 그 자체가 되었다. 집에서 직장으로, 직장에서 집으로. 그러니 그녀가 우주의 고요함에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끊임없이 떠드는 동료들이 보여주듯 소리(sound)는 살아 있음의 한 증거일 텐데, 그녀에게는 자신(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이 오히려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성격 설정은 중요해 보인다. 그녀의 삶에는 너무 없는 것 하나와 너무 많은 것 하나가 있다. 너무 없는 것은 중력이다. 땅에 발붙이고 살게 만드는 힘,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삶의 의미’라고 부르는 그것이 그녀에게는 딱히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무중력 공간인 우주에 오기 전에 이미 그녀는 무중력의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대신 너무 많은 것은 관성이다. 앞에서 확인한 대로, 딸이 죽은 뒤 그녀의 삶은 거의 무의미하다고 해야 할 반복들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난 그냥 운전해요.” 일어나서, 운전하고, 잔다. 요컨대 언젠가부터 그녀는 ‘그 무엇을 위해’(중력) 살아온 것이 아니라 ‘단지 살아 있기 때문에’(관성)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대체 그녀가 지구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화면이 거의 정지하고 사운드가 문득 사라질 때, 그러니까 광막한 우주에 홀로 버려져 있는 그녀의 처지에 각별히 동일시하게 되는 순간들에서, 나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구로 돌아가야 할 이유의 없음


 

어째서 특별한가. 스페이스 휴머니즘 서사의 일반구조라는 것을 상정해본다면 그것은 ‘지구-우주-지구’로 정리될 것이다. 먼저 지구가 전제된다. 그동안 충분히 자각되지 못했던 지구의 의미와 가치가 우주에 와서 강력하게 재발견된다. 그리고 그 힘으로 결국 지구로 돌아간다. 이제 앞의 지구와 뒤의 지구는 같지 않다. 그 의미와 가치는 달라질 것이고, 재난은 삶에 대한 애착을 강화시키는 사건으로 의미화될 것이며, ‘인간적인 것’의 소중함과 위대함은 다시 한번 긍정될 것이다. 이런 서사는 ‘왜 지구로 돌아가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묻지 않거나 너무 쉽게 답해 버린다. 그런데 이 영화 <그래비티>에서 주인공 라이언 스톤에게는 지구가 강력하게 전제돼 있지 않다. ‘우주’ 앞쪽(왼쪽)에 ‘지구’라는 항목이 희미하게만 전제돼 있기 때문에, 이 우주는, 잠시 머물다 곧 떠나야 할 공간이라는 의미에서의 비(非)지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주다. (이 경우, 우주에서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재발견하는 서사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라이언은 기도하는 법조차도 모른다.)


 

이와 관련해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영화에서 맷을 희생시키는 타이밍일 것이다. 그 희생은 관객들에게 필요한 감정이 충분히 축적되기도 전에 다소 빠르다 싶게 이루어지고, 그래서 다른 영화에서라면 어지간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이 상황이 여기서는 얼마간 건조하게 지나가 버리고 만다. (그래서 맷이 “놓을 줄도 알아야 해.”(You have to learn to let go)와 같은 말을 할 때도 그것은 가슴 아픈 명대사가 아니라 그냥 그 순간 꼭 필요한 실용적 충고처럼 들린다.) 왜 이런 설정이 필요했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의 희생이 더 뒤로 유예됐더라면, 그래서 맷과 라이언 사이에 사랑에 준하는 감정이 발생한 뒤에 그 일이 벌어졌더라면, 아마 우리는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되었겠지만 그 대신 우리가 던질 수도 있었을 질문도 함께 흘려보냈을 것이다.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감동적인 대답이 먼저 도착해버렸을 테니까. ‘그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고 그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나는 살아남아야 하고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재난서사의 클리셰다. 그러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맷을 한 박자 빠르게 서사에서 퇴장시켜버리고 라이언으로 하여금 온전히 홀로 우주와 대면할 수 있게 했다.


 

요컨대 이 영화는 지구에 주인공의 가족을 남겨두지 않았고 동료의 죽음을 감상적인 방식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덕분에 이 영화는 얼핏 비슷해 보이는 다른 영화들이 ‘어떻게 지구로 돌아갈 것인가?’를 물을 때, 근본적으로/급진적으로, ‘왜 지구로 돌아가야만 하는가?’를 물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 그리고 이 질문은 결국 다음 질문과 같다. ‘우리는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이것을 ‘인생의 근본질문’이라고 하자.) 언뜻 보면 라이언은 이런 질문을 던질 틈이 없어 보인다. 영화의 거의 대부분에서 라이언은 죽지 않기 위해 고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투는 ‘죽지 않기 위한’ 것이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둘의 차이는 작지 않다. 죽지 않기 위한 고투는 ‘본능’의 소관이고 그 고투를 이끌고 가는 것은 ‘공포’라는 감정이다. 그녀가 시종일관 그런 고투를 한다고 해서 그녀에게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이미 해결돼 있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런 고투의 와중에도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살기 위한 이유’를 질문하게 될 수 있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소유즈(Soyuz)에 연료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이 영화는 바로 그 근본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그래비티>

 

생명을 그 자체로 긍정하기


 

무한한 우주 속에서라면 내 삶이 극적으로 소중해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초연한 허무주의로 이끌려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이 영화가 절반의 지분을 허락해주기를 나는 원했다. 그래야만 ‘우리는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비로소 대결할 수 있을 테니까. 저 질문에 라이언이 ‘아니다’라고 대답할 가능성도 분명히 있을 법한 상황이었으므로 기대가 컸다. 딸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지구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평행 우주로 떠나야 하지 않는가. 라이언 자신도 아닌강(Aningaaq)에게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나도 내 딸을 빨리 보고 싶어요.” 그때 영화에서 퇴장한 줄 알았던 맷이 갑자기 살아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라이언이 맞닥뜨린 유혹을 이해한다는 듯한 말을 한다. ‘시스템을 정지시키고 싶겠지. 눈을 감아버리면 세상 따위는 잊히잖아. 그리고 여기에는 어떠한 상처도 없으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맷이 그 뒤에 할 말이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나는 그가 어떤 말로 라이언에게 삶에 대한 의지를 설득할 것인지를 기대와 불안 속에서 주시했다. 그의 말의 요지는 이것이다. ‘지구로 가기로 했으면 가야지. 가서, 보란 듯이 두발 딱 딛고 살아야지.’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가. 맷이 라이언의 환각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는 라이언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충동의 재현일 것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맷은 ‘죽음충동’을 진압하기 위해 등장한 ‘삶충동’의 현현인 셈이다. 알다시피, 프로이트의 최종 2원론에 따르면, 죽음충동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을 탄생 이전 무기체적 상태의 평온함으로 되돌아가게끔 유도하는 힘이고, 삶충동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자기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즉, 성욕과 사랑과 결속과 연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유도하는 힘이다. 문명이란 인류를 무대로 삶충동과 죽음충동이 벌이는 투쟁일 뿐이라고 단언한 다음 프로이트는 적었다. “그리고 어린이를 돌보는 유모들이 <천국에 대한 자장가>를 부르는 것은 거인들의 이 싸움을 진정시키려는 노력이다.” 이 영화에서 맷은, 통신기를 통해 지구에서 들려오는 자장가가 라이언 안의 죽음충동의 승리를 축하할 준비를 하는 와중에, 삶충동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등장하여 ‘거인들의 싸움’의 향방을 뒤집어 놓았다. 그래서 라이언은 다시 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저 근본질문에 대한 답은 주어진 셈인가?


 

맷의 논리는 단순명쾌하다. ‘가기로 마음먹었으면 가야지.’ 아직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려고 해야 한다. 이 논리와 함께 이 영화는 근본질문 자체가 필요 없는 세계로 넘어간다. 이를테면 ‘life’라는 단어를 ‘삶’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번역하는 세계로. 앞에서 나는 이 영화에서는 지구라는 전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왜 지구로 돌아가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유발된다고 적었지만, 이제 이 영화는, 그 물음을 끝까지 묻지 않고 ‘생명의 전제는 생명 그 자체일 뿐이다’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와 동시에 지구와 우주가 형성하는 구도 역시 ‘삶 vs 죽음’이 아니라 ‘생명 vs 비(非)생명’의 구도로 바뀐다. 앞의 구도에서 삶과 죽음은 맞설 수 있지만, 뒤의 구도에서 비생명은 생명을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다. 즉, 왜 죽음이 아니라 삶이어야 하는가를 묻는 구도가 아니라, 생명은 태어나야 한다는 당위명제가 승인되는 구도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우주선에서 우주복을 벗고 산소를 호흡하는 라이언의 모습을 자궁 속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의 형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보여주었는데, 이미 그때부터 후반부의 흐름은 예고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이 영화의 후반부 스펙터클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생명 탄생 과정의 시뮬레이션이다. 라이언을 태운 소유즈가 우주선의 파편들과 함께 지구를 향해 ‘착륙’하는 장면은 무심코 봐도 (지구라는) 난소를 향해 정자가 돌진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주에서 지구로의 ‘귀환’이 아니라 ‘착상’(着床)에 가깝다.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더이상 어떤 질문도 던질 필요가 없다. 출산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아내를 지켜보며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남편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만 기도하고 응원할 뿐이다. 부디 성공하기를, 기필코 태어나기를. 라이언이 강에 추락해서 또 한번의 호흡 곤란을 겪고 무사히 육지로 ‘기어’올라올 때 그녀는 지금 양수로부터 헤엄쳐 나와 세상 밖에서 첫 숨을 쉬는 (인류 최초의) 아이의 모습으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두발을 딛고 일어서면서 장엄한 음악이 흘러나올 때 이 영화는 지금 막 지구 위에 태어난 하나의 생명을 위한 전 우주적 찬가가 된다. 그러니 이 장면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그녀는, 그녀 자신을 낳은 것이다.


 

그녀는 그녀를 낳았다


 

이 영화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잠재적 허무주의자들에게 생명은 그 자체로 긍정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설득하는 스페이스 시뮬레이션이다. 삶의 의미에 대한 골치 아픈 질문을 생명에 대한 찬가로 돌파하는 이 후반부의 선택은 신선한 묘책인가 아니면 의심스러운 봉합인가. 처음 봤을 때 전자라고 판단했던 나는 이 영화를 몇번 더 보면서 차차 후자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랬다는 이야기를 하자 주변의 지인들이 <그래비티>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해주었다. 그중에서도 소설가 이신조의 해석은 인상적이었고 나는 그것을 여기에 소개하고 싶어졌다. (나의 요약이 왜곡이 되지 않기를.) 그녀에 따르면 이 영화는 여성성이 거의 고갈된 한 여성(라이언 스톤, 이름조차도 남성적인)의 이야기다. 그녀는 라이언 스톤의 우울증적 상태를 30대 이상의 여성들이 흔히 느끼는 ‘심리적 자아 실조 상태’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녀에게 라이언 스톤은 버지니아 울프, 에이미 와인하우스, 최승자 등의 여성 예술가들을 투사하기에 적합한 캐릭터였고, 이 영화의 우주는, 부서진 우주선 잔해들로 상징되는 상처들이 격렬한 속도로 떠도는 여성적 무의식의 공간이었다.


 

그녀는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삶의 의미’보다 훨씬 급박한 것이며, 그것은, 내가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라는 처절한 자각과 관련돼 있다고 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 죽은 사람인 라이언은 우주 공간에서 압도적으로 닥쳐온 실질적인 죽음 앞에서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죽음 직전의 그녀에게 찾아온 맷의 환각은, 융(Jung)식으로 말하면, 내면의 남성성(아니무스)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 그녀의 내면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조화와 합일이 이루어졌다면 이로써 그녀는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 이 영화의 후반부는 그러므로 한 여성의 정신적 재생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 등이 그녀의 독법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독법이 최근 자신의 존재론적인 관심사가 자연스럽게 투영된 것이라고 고백했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의 본질에 더 부합하는 독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영화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 나의 실수임을 깨달았으며, 내가 왜 이 영화를 이렇게밖에 볼 수 없었는지를 고민하느라 원고 마감을 1주일 미루고 말았는데, 이제 해석자로서의 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마지막 한 단락을 더 쓰려고 한다.


 

결국 텍스트에 대한 모든 해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일 뿐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올 하반기 내가 읽은 텍스트들은 대체로 ‘삶의 의미’라는 주제 둘레로 모여들어 서로 연결되고는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가족과 일상의 소중함에서 답을 찾는 태도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고, 신앙에 근거해 답을 제시하는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는 해소해버리는 것에 가까운) 태도 역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답을 찾고 싶었다. 이 와중에 이 영화를 보았으므로 여기서도 같은 질문을 발견(투사)했을 것이다.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영화가 내게 준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질문의 층위를 삶이 아니라 생명으로 바꾸면, 생명이 긍정되는 데에는 이유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아야 한다.’ 나는 이 대답에도 역시 만족하지 못한다. 어쩌면 애초에 질문 자체가 틀린 것일까. 나쁜 질문을 던지면 답을 찾아낸다 해도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게 되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면 끝내 답을 못 찾더라도 답을 찾는 와중에 이미 꽤 멀리까지 가 있게 된다. 일단은 좋은 질문이라 믿고 계속 물어나갈 수밖에 없겠지. 나는 내 생명의 절반을 살았다. 이제 다시 나를 낳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