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맑히는 세 개의 이미지

 

최원현

 

 

 

 1. 동짓달 열 이틀 저녁밥 먹는 시

 

  내 잠재의식 속에는 시계 하나가 살아있다. 그것은 외할머니께서 나의 태어난 날을 기억시키시던 목소리다. 예사로 생각하면 우스운 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지금에 생각해 봐도 그건 내 정체성을 지켜 주는 소리였을 뿐 아니라 이 날에 이르도록 '나'라는 실체를 가장 확실하게 깨우치는 참으로 소중한 소리였던 것 같다.

 

  '동짓달 열 이틀 저녁밥 먹는 시', 내가 말을 하게 되면서부터 노래처럼 익히며 외웠고, 그래선지 나이 쉰이 넘은 지금에도 귓가에 그대로 살아있다. 6.25가 터지자 어머니는 친정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나를 낳으셨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아버지를, 그 두 해 후엔 어머니까지 여윈 탓에 외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두고 외할머니께서는 혹여라도 내가 철도 들기 전에 당신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기라도 하면 어린 내가 태어난 날 조차 모를 수도 있다는 불안이 크셨던 것 같다. 그래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동짓달 열 이틀 저녁 밥 먹는 시'를 외우게 하셨고, 내가 글자를 한 두 자씩 읽게 되자 종이에 써서 자리 밑에 넣어 두시면서 수시로 읽게 하셨다. 저녁 밥 먹는 시(時), 음력 동짓달에 저녁밥을 먹는다면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대요, 또 춥고 해가 짧은 겨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유시(酉時ː오후5∼오후7시)쯤이 될 것 같은데 시계가 귀한 때이긴 했지만 6시나 7시나 유시라고 아니하고 '저녁밥 먹는 시'라고 한 것은 아무래도 내 이해 수준에 맞춘 할머니다운 기발한 교육법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이라도 시켜 놓고 죽어야지, 중학교 입학이라도 시켜놓고 죽어야 할텐데, 중학교라도 졸업하는 것을 보고 죽었으면 좋겠는데, 할머니의 소원은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면서도 한결같이 내가 조금이라도 더 커서 세상 물정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까지 사시길 원하셨다. 그건 당신 생명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오로지 내 삶을 위한 소망이셨다.

 

딸과 사위를 먼저 보내신 황망함 속에서 남은 한 점 혈육에 대하여 베푸시는, 세상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 외손자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안타까움의 사랑이었다. 그러시던 할머니는 내가 결혼을 하고 가정도 이루어 남매를 두기까지 사시다가 여든 여섯을 일기로 돌아가셨다. 작은아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였다. 그러나 다른 외손주들도 많건만 내게서 태어난 내 두 아이들에게는 유난하고 각별히 대해 주셨던 게 사실이다.

 

 '동짓달 열 이틀 저녁밥 먹는 시'는 나를 지지해 주는 큰 버팀 나무였다. 단순한 나의 생월생시를 기억하라는 뜻으로만이 아닌 '근본을 확실히 하라'는 당부였던 것이다. 자기의 신원(身元)도 제대로 모른다면 매사가 확실치 못 할 것이라는 할머니의 생각은 내가 자칫 당신이 아니 계실 경우 전후(戰後)의 불안전한 삶의 환경에서 붙들어주는 이 없이 흘러가다 근본도 모르는 사람이 될까봐 염려하신 거였다. 그런 외할머니와 신발 하나를 벗어도 다른 사람에게 걸리적임이 없게 벗어놔야 할 자리에 가지런히 벗게 하시고, 남의 집에 가서 앉고 일어설 때의 몸가짐에 이르기까지 엄히 교육하시던 외할아버지의 가르치심은 세상이라는 물살 세고 흐린 강물을 건너는 중에도 맑은 강물 줄기를 찾을 수 있게 하는 참으로 지혜로운 인도셨다. 다행히 할머니의 우려는 나이로는 기우로 끝났지만 철들기 전 어린 날 뇌리에 심어지던 '동짓달 열 이틀 저녁밥 먹는 시'는 50년이 넘은 지금까지 어리광이라도 피우고싶게 하는 할머니의 품이요, 내 삶을 받쳐준 거룩한 사랑이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의 힘이 되어주고 있다.

 

 2. 빛 바랜 사진 여섯 장

 

 중학교를 마치고 외가를 떠나 서울의 백부님 댁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겨울 방학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외가로 내려갔다.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다시 찾은 고향은 십 년도 더 된 것 마냥 낯이 설었다. 같이 뛰놀고 학교에 다니던 또래들은 하나같이 대도시로 진학하여 나갔고, 자식들의 교육을 위하여 부모들은 도시에 집을 마련하는 등 생활이 아주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사시는 모습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점심을 먹고 났는데 할머니는 선반에서 뚜껑 덮인 상자 하나를 내리시더니 종이에 싼 무언가를 꺼내 푸셨다.

 

 누렇게 변색된 사진들이 나왔다. 모두 여섯 장, 나와 관련된 사진들이었다. 할머니는 왜 그 때까지 내게 이 사진을 주지 않으셨을까. 할아버지, 할머니, 백부님 내외, 결혼 전의 숙부와 고모, 사촌 형 둘, 내 부모님과 어릴 때 죽었다는 내 형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인데 아마 나는 그때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전투복을 입고 동료들과 찍은 아버지의 사진, 입곱살 때인가 사진관에 가서 막내이모와 찍었던 사진, 아버지의 증명사진 등 6장의 사진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는 가족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할머니께서 한 번 보여주셨던 것 같은데 그땐 너무 어려서였던지 건성으로 보았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나를 보시며 아직 줄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곤 다시 넣어 두셨던가 보다. 나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어릴 적 어른들께서 '제 아비 쏙 빼놨구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요즘 들어 부쩍 그 사진들을 자주 꺼내본다. 벌써 반 백년이 지나 누렇게 되어버린 사진들, 그 많은 사진 속 사람 중 사촌 형 둘을 빼곤 모두 이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다. 왔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라 하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유별나게 가신 분들을 더욱 그리워함은 또 무슨 이유일까?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추억의 사진첩으로만이 아니라 나를 있게 해 주셨던 분들로써 하나같이 '너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라!' 하시는 것만 같다. 막내이모가 아직까지도 보관중인 어머니가 쓰시던 일제 싱가 미싱(본체만 남음) 한 대와 이 사진만이 유품이요 유산의 전부인 셈이다. 그러나 내게 이 사진은 더 큰 의미가 있다. 부모님의 얼굴을 전혀 떠올릴 수 없는 내게 부모님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3. 그리움 만들기

 

 나는 참 내성적이었다. 남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고 그냥 조용히 책을 읽거나 했다. 산과 숲, 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계절 따라 변화는 것을 지켜보며 자랐다. 그런 성격이 아주 자연스럽게 문학 속으로 빠져가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할머니와 이모의 사랑이 넘치도록 컸다 해도 가슴 한 구석에 부모님에 대한 채워질 수 없는 허전함이 늘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들은 내게 새로운 무언가를 찾게 했다. 막연하나마 속 마음을 아니 비어있는 가슴을 누구에겐가 말해보고 싶은 마음이 공책에 몇 줄씩 써보게 했었던 것 같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외가쪽 친척어른들이 돌아가시자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버리고, 그래 가까운 분들조차 아니 계신 곳이 되자 부모님 산소를 내 사는 곳 가까이로 이장하고. 어릴 적 추억을 따라 아내와 아이들 함께 고향 나들이를 했다.

 

 변해 버린 고향, 집터는 밭이 되었고, 없던 길이 새로 나고, 산이던 자리는 평지가 되어 새롭게 집들이 들어섰지만 나의 눈엔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으로만 남아 있었다. 헐린 집터의 밭 속으로 들어가니 장독대가 있던 곳쯤에 소롯이 모시가 자라고 있었다. 몇 뿌리를 캤다. 무언가 내 곁에다 지난날들을, 고향의 그 무엇이라도 하나쯤 두고 싶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록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조금 더 일찍만 서둘렀다면 가능했을 것들까지 그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다고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까지 포기한 건 아니다. 오히려 아쉬움이 더욱 커지고 그리움도 커져간다. 그만큼 그리움을 찾아 나서곺은 마음도 짙어진다. 그래서 나의 문학은, 나의 수필들은 이 그리움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벗어날 때도 되었으련만 그게 잘 안 된다. 이제 아내도 나도 나이 쉰이 넘었다. 아이들도 다 자라 가정을 꾸릴 때가 되었다. 그렇다면 나도 분명 변해야 되지 않을까. 내가 변해야 내 글도 변할 것 아닌가. 늘 어린아이처럼 옛 것에 매인 바 되고, 그리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어른스러움이 아니잖는가. 하지만 어쩌랴. 시간이 가고 나이를 먹어가도 더욱 진해지고 깊어지는 옛 것에 대한 그리움, 그것은 남은 하찮아 보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것밖에 없는, 결코 포기하거나 버리거나 잊을 수 없는 내 전부인 때문이 아닐까.

 

 동짓달 열 이틀 저녁 밥 먹는 시, 할머니의 목소리가 내 귀에 여전히 남아있고, 누렇게 변해버린 사진 몇 장 속의 내 역사와 떨쳐버리지 못한 그리움의 덩이들은 그나마 내가 생명을 누리고 있음을 확인시키는 참으로 보배로운 재산들이다. 오늘은 사진들을 꺼내놓고 두 아이에게 다시 한 번 설명을 해 주어야겠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들이겠지만 나의 설명 속에서 어쩌면 아이들도 아빠의 추억과 고향 이야기를 통해 저들만의 고향 이미지를 만들어낼지 모르겠다. 아니 그래 주었으면 하는 내 간절하고 부끄러운 소망이다.

 

격월간 <수필과비평> 2003.1.2월호/자전적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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