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라 에런라이크 ‘긍정의 배신’

한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에 ‘행복전도사’가 등장한 적이 있다. 스마일 마크를 가슴에 달고 등장하는 그는 “우린 모두 행복해요”라고 외친다. 그러나 전제가 있다. “누구나 한 달에 몇 십억원은 벌잖아요. 몇 십억원 아니면 월급이 아니죠. 그냥 용돈이죠.” 현대사회에서 행복은 곧 돈이며, 행복할 만큼 돈을 벌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강조하는 그는 뒤틀린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씁쓸한 웃음으로 전했다.

미국의 작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사진)가 쓴 <긍정의 배신>(원제 Bright-Sided·부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행복전도사’들을 통렬히 비판하는 책이다. 한국에서 2011년 4월 출간된 이 책은 1년여 만에 3만부 이상이 판매되는 호응을 얻었다.

책은 에런라이크가 유방암 진단을 받아 투병하는 개인적 경험을 서술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암환자들의 생기발랄하고 낙관적인 투병기를 들으며 의문을 갖는다. 어떤 환자들은 암 투병 과정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기에 “암은 축복”이었다고 말하고, 의사들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암이 낫는다고 권한다. “긍정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유방암 환자들의 문화에서 지상명령과도 같이 군림하고 있어 불행하다고 느낄 경우엔 죄의식이 들 정도”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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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어볼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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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은 에런라이크의 출세작이다. 에런라이크는 1998~2000년 식당 웨이트리스, 호텔 객실 청소부, 요양원 보조원, 할인마트 매장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리는 실험을 했다. 목적은 최저임금으로 먹고살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워킹 푸어’의 삶은 쉽지 않았다. 구직 과정, 노동 과정 모두에서 감정과 존엄성이 상처를 받았다. 패스트푸드 햄버거나 편의점 즉석식품으로 끼니를 때웠고, 싸구려 모텔이나 트레일러를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에런라이크는 당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삶을 다시 추적해 2011년 개정판 후기에 적었다. 그들의 임금과 건강은 10년 전보다 더 나빠졌다.

<오! 당신들의 나라>에서도 에런라이크는 여전하다. 직원들을 대량해고한 뒤 자신은 수억달러의 전별금을 챙기는 최고경영자, 경찰까지 동원해 가난한 환자의 치료비를 받아내는 병원, 보험료 받을 때와 줄 때 마음이 다른 보험사를 비판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해고와 가난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기독교 우파의 전략을 비판하는데, 이 같은 문제의식이 <긍정의 배신>으로 이어진 셈이다.

한병철 독일 카를스루에 대학 교수의 <피로사회>(사진)는 <긍정의 배신>의 문제의식을 학술적으로 풀어낸 책이라 할 만하다. 자본주의는 영악한 시스템이다. 주인이 노예를 부리듯 착취하는 대신, 자유를 더 많이 주고 일하라고 부추긴다. 일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자유는 강제다.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이 넘쳐나는 사회 같지만 이면에는 성과주의라는 가시가 숨어 있다. 전근대의 규율사회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면, 현대의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고 한 교수는 분석한다.

독일의 다큐멘터리 감독인 플로리안 오피츠가 쓴 <슬로우>는 <긍정의 배신>과 같은 탐사 저널리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몇 분 간격으로 휴대전화, e메일을 체크하는 삶을 살아가던 오피츠는 “우리가 아낀 시간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취재를 시작한다. 삶을 가속화할수록 시간은 부족해지는 모순을 느끼던 그는 시간 부족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성만 강조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라는 점을 깨닫는다. 시간 연구자, 보스턴컨설팅그룹 임원, 등산용품사 노스페이스 창업자였으나 회의를 느낀 뒤 회사를 나와 칠레 남단으로 떠난 더글러스 톰킨슨, ‘국민총행복’을 국가 목표로 설정한 나라 부탄 등을 찾아 시간에 대한 각기 다른 생각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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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책은 <긍정의 배신>을 포함해 한국에 총 3권 나와 있다. <긍정의 배신>의 인기에 힘입어 전작인 <오! 당신들의 나라>(2009)가 국내에 나왔고, 최근엔 2001년작 <노동의 배신>이 재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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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판사 부키는 <노동의 배신>이 2002년 번역·출간됐으나, 경제학 책으로 소개돼 묻힌 것이 아쉬워 새 번역으로 다시 선보였다고 밝혔다.

  • 이 잘 맞았다. 오프라 윈프리는 마음가짐이 상황을 이긴다고 말했고,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해고돼도 불평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권했다.궁합유방암 투병을 둘러싼 문화는 현재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긍정적 사고’가 구현된 한 사례다. 처음 북미 대륙에 발을 디딘 청교도들의 이데올로기였던 칼뱅주의가 ‘사회적으로 강요된 우울증’이었다면, 19세기 중반 싹트기 시작한 신사상(New thought)은 이에 대한 반동이었다. 신사상 운동가들은 죄책감 대신 행복을, 파멸의 예감 대신 성공의 기회를 잡을 것을 권했다. 신사상은 성공지상주의를 강조하는 20세기 자본주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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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사상은 기독교를 바탕에 둔 자기계발서에도 녹아들었다. <시크릿>은 “원하는 것에 집중하면 그것은 당신에게 끌려온다”고, <긍정의 힘>은 “하나님은 당신이 부자가 되길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긍정의 힘>의 저자 조엘 오스틴 목사의 교회는 십자가, 예수, 스테인드글라스를 찾기 힘들어 교회라기보다는 은행이나 기업처럼 보인다. 속죄, 부활 등 대중이 듣기 싫어하는 전통적 교리 대신 ‘긍정적 사고’로 ‘고객’을 끌어모았다. 온갖 코치와 목사들이 설파하는 ‘긍정적 사고’는 책, CD, DVD로 제작돼 큰 산업을 이루었으며, 경쟁이 치열한 직장에서는 이런 상품들을 구매해 직원들에게 무료로 돌린 뒤 더 많은 실적을 올리라고 볶아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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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제는 이 같은 ‘긍정적 사고’가 현실을 직시하는 걸 방해한다는 점이다. 회사에서 잘리면 “당신의 잘못입니다. 체제를 탓하지 마십시오, 상사를 비난하지도 마십시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코치와 목사들은 조언한다. 테러 위험이 명백했지만 ‘긍정적 사고’로 방어한 덕에 9·11 테러를 겪었고, 주택 거품 붕괴가 임박했지만 잔치의 흥을 깨려는 사람이 없었기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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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인류의 지적 진보는 인간이 감정을 투사해 사물을 볼 때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파악할 때 이루어졌다. 결국 에런라이크는 아무도 차 앞에 튀어나오지 않을 것이라 믿기보다는 부정적인 마음으로 브레이크를 밟을 준비를 해야 한다며 ‘방어적 비관주의’를 갖출 것을 제안한다.

  • 이권우 도서평론가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개인의 가능성을 극대화해야 하고, 이에 따라 피로, 우울, 과잉행동장애에 빠진다”며 “<긍정의 배신>은 이것이 개인이 아닌 체제의 문제라는 점을 짚어줘 독자의 호응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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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존에도 기독교 계열의 비합리적인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책들은 있었지만, 대체로 기독교 교리를 잘못 적용했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 이를 과학적·학문적으로 파고들지는 않았다. 에런라이크는 양자물리학을 제멋대로 인용하는 <시크릿>이나 유방암과 감정의 상관관계를 서둘러 결론내는 학술 논문을 비판한다. ‘기획회의’에 ‘자기계발 다시읽기’를 연재 중인 이원석씨는 “<긍정의 배신>은 기존에는 언급되지 않던 긍정심리학의 과학적 담론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며 “에런라이크가 생물학자(세포생물학 박사)이기 때문에 효과적인 논박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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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긍정의 배신>은 무엇보다 ‘쉽게 읽힌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에런라이크는 개인적 체험 위에 현장 취재, 인터뷰 등을 더해 생동감을 냈다. 문체는 유머가 있으면서도 신랄하다. 오스틴의 교회를 “팝콘만 없지 교외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완벽하게 똑같았다”고 묘사하는가 하면, 긍정심리학의 핵심 인물인 마틴 셀리그먼이 내놓은 ‘행복 방정식’에 대해서는 “방정식을 제시하면 과학처럼 치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권우 평론가는 “서구 저자들의 경우 문제의 인물을 실제로 만나보고 객관적 사실을 드러내 공감을 사는 탐사 보도 형식의 저술들을 잘 써낸다”며 “한국에도 그와 같은 형식의 책이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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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향 신문 백승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