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전설 / 유혜자

 

 

 

 

 

귀뚜라미는 시인보다 먼저 때묻지 않은 순수한 언어로 가을의 시를 읊조린다. 새벽에 뜰에 나서면 불꺼진 밤에 시를 읊다 떠난 귀뚜라미의 흔적처럼 말갛게 맺힌 이슬방울. 어딘가 숨어서 귀뚜라미는 읊조렸던 시에 대한 평가를 숨죽이고 지켜볼 것이다.

때로는 청명한 하늘을 손으로 떠받쳐 들고 싶지만, 지난 것은 가냘픈 노래밖에 없어서 창호지 사이에서 읊조리다가 지창에 어린 제 그림자에 놀랐으리라. 지난 가을에 겪었던 가슴속의 사랑, 기쁨, 슬픈 비밀까지 도란도란 이야기할 때는 창밖에서 은밀하게 귀 기울리다가 구슬픈 넋두리에는 물기 머금은 소리로 처량하게 울어댄다.

 

어느덧 첫 수필집을 퍼낸지 23년이나 됐다. 귀뚜라미 소리가 울음이냐 노래냐. 새가 우는 것인가 노래하는 것인가의 정답을 논하는 것만큼이나 글쓰는 것이 고통인가 기쁨인가를 단정하지 못하겠다. 귀뚜라미는 고뇌와 외로움으로 지친 가슴에 다가서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문틈에서 머뭇거린다. 번민하고 회의하는 이에게는 외로운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천장 위에서나 마루 밑에서도 울어댄다. 지친 영혼들을 지켜주기에 목이 쉬는 줄도 모르고.

멀리 숨어서라도 그리운 이의 행동을 감자하여 함께 잠 못 이루고, 때로는 한숨 쉬는 호흡에 맞추느라 초조하여 노래를 멈춘다. 그러다가 꿈속에 빠진 이들의 머리맡에는 어지러운 꿈길을 다독거려 주는 귀뚜라미.

수필은 다른 장르보다 엄격한 규격없이 집안의 귀뚜라미처럼 사람들의 애환을 잘 알아서 담는 걸로 여기고 출발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세월을 여무는데 글은 쭉정이인 걸 안타깝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 없어도 아쉬워하지 않고, 고요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날이 밝으면 어느 풀섭으로 잠적해버리는 귀뚜라미 같은 존재여서 허탈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구뚜라미는 사연 많은 사람들의 둘도 없는 벗이었던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귀뚜라미가 없는 가을 저녁은 얼마나 적적할까. 미지의 길을 찾으려 회의하면서도 슬기롭게 견디어내는 인내심을 길러 준다. 의미 깊은 후렴처럼 자꾸만 반복하며 일깨워주기도 한다.

우리가 배를 탔을 때 흔들리는 것이 자신의 의지보다는 배의 밑에서 흐르는 물살의 영향이듯 우리 삶의 흔들리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 어느 조화의 힘이라는 걸 구뚜라미 우는 밤에 깨달아 본 일이 있다. 별도 달도 없는 밤에 귀뚜라미와 함께 새벽을 기다리다가 어둠이 줄어드는 순간, 맘속에 떠받들고 있던 불씨가 뚜렷이 떠오르기도 했다. 불씨 같은 작가의 예지.

어렸을 때 어른들이 예민한 사람을 ' 귀두라미 사촌' 이라고 했다. 귀뚜라미의 언어를 모른다고 자탄하기 전에 그들의 신선하고 또랑또랑한 발음을 느낌으로 터득해야 한다. 영혼의 깊이에서 우러나는 청초한 언어의 기도를.

안개 속의 언어이듯 빛깔이나 내음도 어렴풋하고 그윽하여 소음 사이에서 해독하기에 역부족이다. 그러나 귀뚜라미 울음은 엣된 소리나 노숙한 소리가 구별되지 않고 또랑또랑해서 좋다. 수필 속에서 연륜이나 관록은 느껴지되 허무하지 않고 참신한 생명력이 있었으면 한다. 초원의 한자락 푸른 그늘에서 우는 맑은 소리에는 우리의 영혼도 맑게 씻길 것이다.

모래알처럼 흘러내린 낮 동안의 언어를 맑게 씻고 고치에서 나방이로 화하는 밤의 통로를 거쳐야 하리라. 정선된 언어로 그렇게 승화되는 멋진 글을 쓰고 싶다. 안개 속에서 맑음과 갬, 바람을 관측하기도 하는 귀뚜라미의 지혜를 우선 닮아야 한다. 그리고 귀뚜라미 노래처럼 공명을 줘서 때로는 울적하게 울고 때로는 우렁차게 합창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마른 풀이 쓸쓸하게 물결 지어 흐르는데 귀뚜라미 노래에 허무와 좌절의 휘파람만으로 화답할 것인가. 흐리고 핏발 선 눈으로 헤맬 때, 맑고 청량한 노래로 우리 삶의 방향과 지표로 인도해 주던 것이 귀뚜라미의 전설이 아니다. 미로를 헤맬 때 향기 있는 글로 등대가 되고 싶은 작가의 욕심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