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재미수필 신인상

 

       <가작>

 

      일곱 번의 만남

이혜자

 

1976, 스물네 살의 나는 갓 백일이 지난 아들을 업고 동부에 있는 군인도시 Fort Mead 에 도착했다. 2주 전, 군대에 파견 근무로 먼저 와 있던 남편은 겨울 새벽 찬바람 속에 마중을 나왔다. 처음 밟은 미국 땅에서 나는 마치 컴컴한 허허벌판에 떨어진 길 잃은 방랑자가 된 느낌이었다. 군에서 배정해 주는 아파트에 입주하기까지 우선은 이민 온 한국인 아파트의 방 한 칸을 월세로 살아야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미국생활의 첫 겨울을 시작했다. 한국의 겨울처럼 몹시 추웠으며 눈도 많이 내렸다. 남편이 군에서 받아오는 월급으로 한 달 또 한 달을 살아가는 최저의 생활이었다.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었지만 재미도 있었다. 여러 인종이 섞여 살고 있는 환경은 일찍이 내 인생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움이었다. 3년을 사는 동안 딸이 태어났고 우리 네 식구는 똘똘 뭉쳐 살았다. 남편의 제대와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이사를 했다.

 

많은 이민자의 고달픈 삶이 우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편은 하루 12시간 이상을 막노동으로 생활을 꾸려가면서 틈틈이 우체국 직원 채용시험을 준비하였다. 일 년 후 그는 우편배달부가 되었다. 매일 오버타임을 도맡아 하며 열심히 일했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겨우 생존만이 해결될 뿐 여가생활은 꿈도 꾸지 못하는 빠듯한 살림이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도 우체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에 온 지 8년이란 시간이 흐른 때였다. 영어에 자신이 없었지만 미국에 오기 전 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 했기에 의사소통은 어느 정도 되리라 생각했다. 막상 일을 하면서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우왕좌왕 하는 일이 잦았고 동양 여자라는 인종 차별적인 무시와 불공평한 대우를 참아내는 고통으로 미국에 온 것을 후회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왼쪽 눈 밑에 조그마하고 딱딱한 혹이 만져졌다. 한 달이 되도록 나아지지 않기에 안과를 찾아 검진을 받고 조직검사를 했다. 피부암이 눈가에서 자라고 있다는 결과를 알려주는 의사의 말을 들으면서 무덤덤했다. 며칠 후 눈가를 다섯 층이나 도려내며 조직검사를 병행하는 수술을 받았다. 다시는 아프지 않기를 다짐했지만 이것이 그 후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 몸 안에서 7가지의 서로 다른 암세포의 출현을 알리는 첫 만남인 줄을 알지 못했다.

 

암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그 해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유방암 검진을 받았다. 왼쪽에서 발견된 악성 종양을 부분이든 전체든 절제수술을 해야 했다. 두 번째로 다가온 만남은 나를

 

힘들게 했다. 방사선 치료의 횟수가 거듭되면서 유방 피부는 여름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타들었고 유두에서는 피가 나와 쓰리고 아팠지만 견디어 냈다. 그렇게 7주가 지나갔고 곁에서 남편은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어서 호르몬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도 독하게 일을 다녔다. 반갑지 않았던 두 번째의 만남이 견딜 수 있을 만큼 회복되어 갈 무렵, 4년 반 만에 내 몸에서 세 번째의 또 다른 만남이 채비를 갖추고 있을 줄이야. 이번에는 흔치 않다는 요도 암이었다. 왼쪽 신장과 요도를 들어냈고 방광과 연결되는 윗부분을 제거한 후 목 부분에 대여섯 개의 줄을 연결하고, 아래쪽으로는 약물이 들어가는 줄과 세척하는 줄을 이어놓았다. 내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든 공포영화 속 괴물이었다. 40바늘이나 꿰맨 수술 자리는 뱃가죽이 천 조각인 양 바느질 되어 있었다. 다시 수개월 후 그해 가을, 너무나도 빨리 찾아온 네 번째의 만남 때문에 나는 몹시도 당황했다. 샤워기의 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피는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비뇨기과 의사가 살피는 컴퓨터 화면 속의 암세포는 독버섯의 예쁜 빛깔처럼, 바다 속 깊은 곳에서 자라는 산호처럼 아름답기까지 했다. 방광암은 조직검사 없이도 진단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모든 수술이 고통스럽듯이 네 번째 손님과의 만남에서는 살아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매일 방광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내 몸을 지켜주는 수문장이 되어 주어야 해. 눈도 둘, 유방도 둘, 신장도 둘이었기에 그중 하나를 잃었어도 나는 살아 있잖아. 하나 뿐인 네가 나를 만나러 왔을 때 너무도 무서웠지만 너와 내가 힘을 합쳐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어.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너도 더 이상 나와 함께 있을 수 없을 테니까.’ 수술 후 3개월에 걸쳐 받은 항암치료는 여느 암치료와는 달리 방광 속으로 약물을 넣는 것이라 60세 문턱에 있는 나이였지만 여자로서의 수치감을 느끼게 한 과정이었다.

 

길고 긴 추운 겨울이 지나고 새해를 맞이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해부터는 다른 만남이 나를 찾지 않기를.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온몸을 점검하는 중 악착스럽게도 나와 살겠다는 다섯 번째의 만남이 무더기 째로 달려들었다. 4기 말기 암에 해당되는 복합 암으로 폐, , 임파선마다 악성 종양이 퍼져 있었다. 항암치료를 해서 약이 잘 들으면 생존율 50%이거나 아니면 6개월 시한부 생명이라 했다. 내게 선택을 하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죄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느낌이 이럴 것 같았다.

 

거의 일 년에 걸친 치료가 지속되었다. 24회의 항암치료와 일곱 차례의 수혈을 하는 동안 머리카락은 다 빠졌고 눈썹마저도 간 데가 없었다. 또다시 괴물의 형상, TV 에서 자주 본 암 환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적응하며 지냈지만 항상 곁에서 지켜보는 남편은 욕실에 물을 틀어놓고 아주 많이 울었나보다. 내가 불쌍해서.

 

이제 나는 힘들었던 일곱 번의 만남을 끝냈다. 지난 8년 동안 머물렀던 아픔과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별이 되기를 바라면서. 너무 아팠고 두려웠으니까. 나는 지금도 그때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두렵다. 항암치료 시작 후 한두 달은 그럭저럭 견딜 만 했고 석 달이 지나니 몸의 모든 세포가 죽어갔다. 나는 흡혈귀가 피를 흡혈하듯 이빨이 아닌 혈관 속으로 수혈을 받았다. 힘이 솟아나는 기분이 들었지만 어딘가 상쾌하지 않다. 치료 한 번이면 다시 힘들어지니까. 나는 이 모든 고통을 감내했고 결국 살 수 있었고 지난 봄 32년의 우체국 근무를 마감했다. 세상의 많은 암 환자에게 고통과 마주서서 절망하지 않고 이겨내면 아름다운 삶이 찾아온다고 외치고 싶다.

 

2017년 신인상 가작 이혜자 2.jpg

 

 

 

<수상 소감>

 

 

오늘은 나의 이민생활 41년 만에 감동적인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신인상 작품 공모전에 응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부족하며 두서없이 써 내려 왔던 나의 이야기를 그때에 나와 같은 고통을 받고 지내시며, 절망하고 계실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용기를 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응모를 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입상소식에 은퇴 후 한동안 하는 일없이 시간을 흘러 보내며, 텅 빈 가슴으로 삶의 허탈함을 불평만 하던 못난 생각이 부끄러워 저 멀리 달아나는 나 자신도 보았습니다.

 

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글을 쓰기에는 너무 모자라는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열심히 노력했던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정말 기쁩니다. 나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 주신 선배님들을 모시고 열심히 배우며 노력하는 진실한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또한 주위에 계신 많은 분들이 호응하는 인생살이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삶을 살겠습니다. 심사위원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