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회 재미수필 신인상

      

        <가작>

   

      

금남(禁男)의 계곡

 

김 혜자

 

한 올 남김없이 머리를 민 여자 비구니를 본다.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맑은 얼굴에 민둥머리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눈이 시리다. 나이는 얼마나 됐을까? 내가 느끼는 감정으론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꽃다운 봄철인 것 같다. 얼굴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비구니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번민과 갈등, 고통은 피할 수 없는가 보다. 그녀가 삶의 향로(向路)를 바꾼 결정적 원인은 무엇일까? 모든 게 궁금해졌다.

 

금남의 공간, 천축산 서쪽 기슭에 있는 연못에 부처님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불영사(佛影寺)를 찾았다. 절 입구를 들어서자 푸른 초록 숲길이 명상의 길로 나를 인도한다. 오후 한나절 햇살이 해맑은 얼굴로 명상의 길을 어루만지며 재잘대고 있다.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밀조밀한 경관이 매혹적이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본다. 큰 소나무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사찰은 나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곳이 아니다. 어렸을 때 부모 따라 절에 가 본 기억이 전부다. 나는 절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천왕상이 싫었다. 눈을 부릅뜨고 왼손은 주먹을 쥐고 바른 손은 칼을 잡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벌린 입에서 금방이라도 큰 소리의 호령이 내릴 것 같아 무섭고 싫었다. 절 밥도 귀신이 먹다 남긴 것으로 생각되어 아버지 눈치를 보며 먹는 척한 기억이 난다. 동생이 하늘나라로 간 일 년 뒤 한국에 가니 동생을 절에 모셨다고 했다. 동생의 사돈댁이 개인 사찰을 지은 착실한 불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으로 절에서 동생의 명복을 빌고 절을 했다.

 

비구니스님이 가련하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뚱뚱한 스님을 별로 본 적이 없어서 그럴까? 애처로울 정도로 연약하게 보이는 모습이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줄도 모른다. 물론 채식을 하시기 때문이겠지만, 날렵한 몸매는 속세의 미련을 버리기 위한 고행(苦行)에서 얻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수도(修道)의 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구니 절에 오니 해맑은 김일엽(金一葉, 본명 김원주) 스님의 생각이 새롭다. 나의 어머니가 언니처럼 지내시던 동향(同鄕)인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李兌榮) 씨의 남편 정일형(鄭一亨) 박사의 의붓동생이었기에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었다. 일엽스님은 일본 유학을 하신 언론인, 교사, 시인, 수필가다. 일본에서 만난, 춘원(春園) 이광수 씨와도 일엽이란 필명을 지어 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김원주씨는 일본 동경 명문가 출신인 오다 세이죠를 만나

 

아들 김태신을 낳았지만, 장군의 집안에서 반대로 아들만 남기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통하여 세인(世人)의 고루한 도덕관을 비판하는 사회적인 편견의 논설을 썼다. 김원주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그는 시대가 용납할 수 없는 여성의 독립적인 연애와 애정을 주장하는 여성해방운동가로 숱한 남성들과 연문을 뿌렸다. 그의 행적은 세간에서 좋지 않은 소문을 뿌렸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최초의 미스 코리아 대회 심사위원도 담당한 김원주는 늘 연예 뉴스의 주인공이었다.

 

그녀가 파란만장의 삶을 접기로 결정한 것은 수덕사 만공(滿空)스님을 만난 후에 일이다. 출가 후 일엽스님은 펜을 꺾고 글을 쓰지 않았다. 다시 글을 쓴 것은 30년 후에 일이다. “어느 수도 인의 회상(Reflections of a Zen Buddhist Nun)”1960년 당시 베스트셀러로 영문판으로도 출간되었다. 그후 일엽 스님의 저서인 베스트셀러 중 청춘을 불사르고 (1962), 청춘을 불사른 뒤 (1974)’, 수덕사의 노을 (1976), 두고 간 정 (1990), 등의 책을 읽고 감명받아 불교에 귀의 또는 입산한 사람이 많다고 한다. 실제로 수덕사 주지이었던 웅산 스님도 일엽 스님의 책을 읽고 출가를 결심했다.

 

아들 김태신이 14살 되던 해 수덕사를 찾아왔으나, “어머니로 부르지 말고 스님으로 불러라하며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일본으로 돌아온 아들 김태신은 도쿄 미술학교를 거쳐 화가로 활동하다 한국의 국적을 얻고 어머니 일엽스님과 같이 출가하여 일당 스님으로 동양 채색화 기법으로 화승(畵僧)의 길을 걸었다. 그런 일엽스님의 일생을 잘 알고 있기에 비구니스님만 보면 불교로 출가한 이유가 늘 궁금해진다.

 

목탁 소리가 들린다. 번민과 고통 속에서 깨달음을 찾는 기도의 염불 소리가 계곡을 메아리친다. 반쯤 열어놓은 문 사이로 비치는 비구니의 그윽한 모습이 보인다. 여승의 모습이 왜 그리 외로운 그림자로 비치는 것인지? 내 생을 후회하지 않고 이 순간에 충실하기 위해 스님은 무엇을 빌고 계실까? 다음 생에서도 비구니 스님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고 계시는 것일까? 한평생 지은 업을 어떻게 다 풀어내려 하실까? 가파르게 달려온 삶이 연등 하나로 환해질까? 가녀린 목소리로 퍼지는 염불 소리에 숙연해지는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깊은 상념에 잠겨 본다.

 

숨 가쁘게 달려온 나의 삶을 뒤돌아본다. 지금 나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인생. 세월에 떠밀려 이기지 못한 덧없는 시간을 꾸역꾸역 삼키며 살아온 나날이 아니던가? 자문을 해본다. 금남의 계곡에서 들리는 불경 소리가 내 가슴을 울린다. 나의 번뇌를 내려놓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고백을 털어놔야 할지 의문이지만 오늘 밤만은 나도 비구니가 되어 내 인생의 죄를 속절없이 털어놓아야 할까 보다.

 

 

          <당선소감>

 

2017년 김혜자  신인상 가작 3.jpg

 

 

 

       

< 당선 소감>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세상의 빛이 되는 글쓰기.

 

문학은 나와 떨어질 수 없는 가슴에 담고 살아온 짝사랑 같은 존재였습니다. 늦깍이로 시작한 문학이지만, 분주하게 살아온 삶의 여정들을 진실하고, 미래지향적인 글로 풀어내고자 조심스레 다잡아봅니다. 몇 년 전 90세의 어머니가 수필가로 등단하셔 활동하시는 모습을 접하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저를 문학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격려와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소천하신 강병남 수필가님께 이 영광을 드립니다. 젖은 날개를 털고, 등지에서 비상하는 새처럼, 이제 훨훨 자유를 향해 날아오르는 저를 지켜봐 주십시오.

 

수고하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로벌화 된 재미수필 문학가협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