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루쉰      

 

 

1. 20여년과 2천여리 

       

나는 혹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2천여 리나 떨어진 먼 곳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20여 년 동안이나 떠나 있었던 곳이었다.

마침 한겨울이라 그런지 고향이 가까워지면서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차가운 바람이 선창 안에까지 윙윙 소리를 내며 불어닥쳤다바람받이 휘장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 뿌옇게 흐린 하늘 아래 여기저기 쓸쓸하고 황폐한 마을이 누워 있었다아무런 생기도 느낄 수 없는 풍경이었다나는 마음이 슬프고 허전해졌다.

여기가 내가 지난 20년 동안 늘 기억하며 그리워하던 고향이란 말인가?

내가 기억하고 있던 고향은 전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내 고향은 이보다 훨씬 더 좋았다그러나 내가 그 아름다움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좋은 점을 말해보려고 하면 그 모습은 순식간에 지워져버린다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그림자도형상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해야 할 말마저 자취를 감춰 버린다.

아마 고향이란 것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난 스스로를 위로하며 이렇게 해석해보았다비록 아무 발전이 없다고 해도 또한 내가 느낀 것처럼 쓸쓸하거나 허전한 것도 아니다단지 나의 심정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내가 이번에 고향에 돌아온 것은 사실 애당초부터 유쾌한 심정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왜냐하면 나는 이번에 고향과 작별하기 위해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우리 가족이 함께 살던 오래된 집은 이미 성()이 다른 사람에게 공동으로 팔아 버린 상태다집을 비우고 넘겨줘야 할 기한이 바로 금년 말까지였다그래서 정월 초하룻날 이전에 고향에 돌아와서 정들었던 옛집과 영원히 이별하고정든 고향을 멀리 떠나 내가 밥벌이를 하고 있는 다른 고장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고향 집 대문 앞에 이르렀다.

기와지붕 용마루 위에는 마른풀들이 가닥가닥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그것은 이 오래된 집이 어쩔 수 없이 주인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별채에 살던 다른 친척들은 이미 거의 이사를 한 모양이어서 무척 조용했다내가 우리 집 방문 가까이 갔을 때 어머니께서는 벌써 마중을 나와 계셨다그리고 그 뒤를 따라 여덟 살 난 조카 굉이(宏兒)가 뛰어나왔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보고 무척 기뻐하셨지만 또 여러 가지 처량한 심정을 감추고 계신 것 같았다날더러 앉아서 차나 마시자고 하시면서도이사에 관해서는 선뜻 말씀을 꺼내지 못하셨다굉이는 아직 나를 본 적이 없는지라 멀찍이 떨어져서 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이사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했다나는 이미 우리가 살 고장에 거처할 셋집을 계약해 놓았고 또 가구도 몇 가지 사두었다는 말씀을 어머니께 드렸다그리고 이제 집안에 있는 목기(木器)들을 모조리 팔아서 필요한 가구를 몇 가지 더 장만해야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도 좋다고 하셨다짐짝도 대충 정리해서 한 군데 챙겨놓았고목기도 운반하기 불편한 것들은 절반쯤 팔아버렸다는 말씀이었다다만 아직 그 판 값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 이틀 쉬고 나서 떠나기 전에 친척 어른들을 한 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라그런 다음에는 바로 떠날 수 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그리고 룬투(閏土얘긴데 말이다그 애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네 소식을 묻곤 했단다너를 꼭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네가 집에 도착할 날짜를 그 애한테 대충 알려줬으니아마 곧 찾아올 거야."

그때 내 머리 속에는 갑자기 기묘한 한 폭의 그림이 번갯불처럼 퍼뜩했다진한 쪽빛 하늘에 둥그런 황금빛 보름달이 걸려 있다... 그 아래는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끝없이 파아란 수박밭이 펼쳐진다그 가운데 열 두어 살쯤 되는 소년이 목에는 은 목걸이를 걸고 손에는 쇠 작살을 들고서 어떤 오소리를 힘껏 찌른다그러나 오소리란 놈은 꿈틀 몸을 한 번 비틀더니 도리어 소년의 가랑이 밑으로 빠져 도망쳐버린다.

그 소년이 바로 룬투였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기껏해야 열 몇 살밖에 안되던 무렵이다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30여 년 전의 일이었다그땐 나의 아버님께서도 생존해 계셨고집안 형편도 좋아서 나는 말하자면 어엿한 집안의 도련님이었다.

그해는 우리 집에서 조상에게 드리는 큰제사를 치러야 할 순서였다그 제사는 삼십여 년만에 한 번씩 차례가 돌아오는 것이어서 아주 정중하게 치러야만 했다정월에 조상의 조각상 앞에서 제사지낼 때에는 차려 놓는 물건도 많고 제기(祭器)도 가장 좋은 것을 특별히 골라서 썼다또 제사에 절하러 오는 사람도 무척 많아서 제기를 도둑맞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했다.

그때 우리 집엔 망월(忙月)이 한 사람 있었다[우리 고향에서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세 가지로 나눈다. 1년 내내 일정한 집에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이 장년(長年), 날짜를 따져서 남의 집에 가서 일하는 사람을 단공(短工), 자기 농사를 지으면서 섣달 대목이나 명절 때또는 도지료를 받아들일 때만 일정한 집에 가서 일하는 사람을 망월이라 한다). 그런데 그 때 어찌나 바빴던지 그 망월은 아버님께 말씀을 드려 자기 아들 룬투에게 제기를 지키도록 시켰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버님은 그렇게 하라고 승낙하셨다나도 대단히 기뻤다난 진작 룬투라는 이름을 들은 일이 있었고또 그 애가 나와 거의 같은 또래인데 윤달에그것도 오행 중에서 토가 빠진 날짜에 태어났다고 해서 그 애 아버지가 이름을 룬투로 지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 애는 또 새 덫을 놓아서 새를 잘 잡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허구헌 날 새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새해가 되면 룬투도 올 테니까 말이다가까스로 섣달 그믐께가 되었는데어느 날 어머니께서 룬투가 왔다고 일러주셨다나는 날아갈 듯 기뻐하며 밖으로 뛰어나가 보았다.

그 애는 마침 부엌에 있었다발그스름한 둥근 얼굴에 머리에는 조그마한 털모자를 쓰고 목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은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이것은 그 애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었다그 애가 일찍 죽을까봐 두려워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고 이런 목걸이를 걸게 해서 룬투를 지키도록 한 것이다룬투는 사람들 앞에서 무척 부끄럼을 탔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사람들이 옆에 없을 때면 그 아니는 내게 이야기를 걸어왔다한나절도 못되어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우리가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단지 룬투가 성에 들어와서 무척 기뻐하던 기억이 난다그 아이는 그 동안 자기가 보지 못하던 것들을 성 안에서 많이 구경했다고 말했다.

 

 

 

2. 보석처럼 신기한 추억 

 

 

그 다음날나는 룬투에게 새를 잡아달라고 졸랐다그러자 룬투는 말했다.

"그건 안돼먼저 큰 눈이 와야 해모래사장에 눈이 오면눈을 쓸어 빈터를 만들고거기에 짤막한 막대기로 대나무 소쿠리를 버티어 놓는 거야그 다음에 나락 쪼가리를 거기 뿌려 놓았다가 새가 와서 쪼아 먹고 있으면 내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곳에서 줄을 잡아당기지그러면 대나무 소쿠리가 넘어지고새는 소쿠리 안에 갇혀 도망칠 수 없게 되지그렇게 무슨 새든지 다 잡을 수 있어참새산비둘기파랑새..."

그래서 나는 눈이 내리기를 간절하게 기다렸다룬투는 또 내게 말했다.

"지금은 너무 추워나중에 여름이 되거든 우리 집에 놀러와우리는 낮엔 바다에 가서 조개껍데기를 줍는다붉은 것푸른 것뭣이든 다 있어귀신을 쫓는 조개도 있고부처님 손 같은 조개도 있어그리고 밤엔 아버지하고 수박을 지키러 간단다너도 함께 가자."

"네가 도둑도 지킨단 말이야?"

"아니야우리 동네에선 길 가던 사람이 목이 말라서 수박 한 개쯤 따먹는 거야 도둑질도 아니지우리가 지켜는 것은 두더지고슴도치 그리고 오소리야달밤에 어디선가 사각사각 소리가 나면 그건 오소리란 놈이 수박을 깨물어먹는 거야그러면 쇠 작살을 들고 살금살금 다가가서..."

그때 나는 이 오소리란 놈이 어떤 짐승인지 전혀 몰랐다몰론 지금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그저 어쩐지 조그만 개처럼 생긴영악스러운 동물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놈이 물거나 그러지 않아?"

"쇠 작살이 있잖아가까이 가서 오소리를 발견하면 당장 찔러버려야 해그 자식은 워낙 약아빠져서 오히려 사람 쪽으로 달려들어선 가랑이 밑으로 빠져 달아나 버리거든털이 마치 기름칠한 것처럼 매끄러우니까..."

나는 그때까지 세상에 이렇게 신기한 일이 많은 줄은 꿈도 꿀 수 없었다바닷가에 형형색색의 갖가지 조개껍데기가 있고또 수박에 그렇게 위험한 내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그때까지 나는 수박이란 그저 과일가게에서 파는 것으로만 알았을 뿐이었다.

"우리 모래사장엔 말이야밀물이 들어오면 날치들이 팔딱팔딱 뛰어오른단다그 녀석들은 모두 청개구리처럼 두 다리가 달려 있어서..."

아아룬투의 가슴 속엔 그때까지 내 주변의 친구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신기한 일들이 무궁무진하게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다룬투가 바닷가에서 그렇게 신기한 것들을 만나고 있을 때그 애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모두 나처럼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안마당에서 네모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정월은 다 지나가 버리고 룬투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나는 그만 어쩔 줄 모르고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룬투도 부엌에 숨어서 울면서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하지만 결국 룬투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가버리고 말았다.

그 애는 나중에 자기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내게 조개껍데기 한 꾸러미와 아름다운 새의 깃털 몇 개를 보내주었다나도 한 두 차례 뭔가 그 애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런 뒤로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제 어머니께서 그 애의 얘기를 꺼내시자 나는 어렸을 적의 그 기억이 갑자기 번갯불처럼 되살아나서 마치 나의 아름다운 고향을 다시 찾은 것만 같았다나는 대뜸 어머니께 물었다.

"그것 참 반갑군요그래룬투는 어떻게 지내요?"

"그 애 말이냐걔 살아가는 것도 무척 힘든 모양이더라."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밖을 내다보시더니 다시 말씀하셨다.

"저 사람들이 또 왔구나말로는 목기를 사러왔다고 그러면서 닥치는대로 아무 물건이나 손에 쥐고 가 버리니 내가 잠깐 나가봐야겠다."

어머니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셨다문밖에서 여자들 몇 사람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조카 훙얼을 불러다가 내 앞에 앉히고 글씨를 쓸 줄 아는지다른 고장에 가보고 싶은지 등을 물어보았다.

"우리기차를 타고 가요?"

"그래우린 기차타고 갈 거다."

"배는요?"

"먼저 배를 타고그런 다음에..."

"어머나세상에이렇게 컸네수염도 길게 기르고!"

갑자기 찌르는 듯 날카로운무척 괴퍅한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얼른 고개를 들었다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입술이 얇은 쉰 살 가량 되어 보이는 여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두 손을 허리에 짚고 치마도 두르지 않은 채 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제도기구 가운데 하나인 콤파스가 두 발을 벌리고 있는 모습과 똑같았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날 모르겠어이전에 내가 안아준 일도 있는데!"

나는 더욱 어리둥절할 뿐이었다마침 다행스럽게도 어머니가 들어오시더니 옆에서 말씀하셨다.

"저 앤 너무 오랫동안 객지에 나가 있어서 아마 까맣게 잊었을 거야."

어머니는 그러더니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아마 너도 기억이 날 거야저 양반이 우리 집 길 건너편에 사시던 양씨네 둘째 아주머니시단다... 왜 그 두부가게를 하던..."

그렇지이제 생각이 난다내가 어렸을 때우리 집 건너편의 두부가게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던 양씨네 둘째 아주머니였다사람들은 모두 이 여자를 '두부가게 서시(西施)'라고 불렀다하지만 그때는 하얗게 분칠을 했었고지금처럼 광대뼈도 튀어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입술도 이렇게 얇지는 않았다또 그 때는 하루 종일 가게에만 앉아 있었던 탓인지 나는 이런 콤파스 같은 자세를 본 적이 없었다.

당시에 마을 사람들은 이 여자 덕분에 두부가게의 장사가 잘 된다고 말하곤 했다하지만 그 때만 해도 나는 나이가 어린 탓이었는지 그런 말에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하고 그 동안 그만 고스란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3. 콤파스와 룬투를 다시 만나 

 

 

그러나 이 콤파스는 지금 몹시 비위가 상하는 모양이었다마치 업신여기는 듯한 표정으로 마치 나폴레옹도 모르는 프랑스 사람이나워싱턴도 모르는 미국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냉소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잊었다고하긴 정말 귀한 양반들은 워낙 눈이 높으시니..."

"설마 그럴 리가... 전 그저..."

"그럼 내 도련님한테 할 얘기가 있소도련님네는 부자가 됐고또 이렇게 무거운 짐들을 일일이 운반하기도 거추장스러울 테니내게 주지 그래요이런 낡고 하잘 것 없는 물건들을 어디다 쓰겠소우리 같은 가난뱅이에겐 그래도 이런 물건이 쓸모가 있을 테니까 말이오."

"난 부자가 아닙니다또 이걸 팔아야 그 돈으로..."

"아이구 참지사 벼슬까지 하고서도 부자가 아니라고당신은 지금 소실이 셋이나 되고 문밖에만 나서면 여덟 사람이 떠메는 큰 가마를 타면서도 부자가 아니란 말이야그런 말로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서 있었다.

"원 세상에부자가 될수록 지갑 끈을 죄고지갑 끈을 죌수록 더욱더 부자가 된다더니 정말 그 말 그대롤세."

콤파스는 화가 나서 돌아서더니 투덜대면서 밖으로 걸어나갔다그러나 나가면서 슬쩍 어머니의 장갑 한 켤레를 허리춤에 쑤셔 넣고 사라져버렸다.

그 다음에는 또 근처의 친척들이 나를 찾아왔다나는 그들을 상대하면서 틈틈이 짐을 꾸려야 했다이렇게 사나흘이 지나갔다.

날씨가 몹시 춥던 어느 날 오후에 나는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앉아있었다그러다가 나는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인기척에 머리를 돌려 바라보았다그를 보고 나는 그만 놀라서 부랴부랴 몸을 일으켜 맞으러나갔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룬투였다보자마자 나는 그가 룬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그러나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룬투는 아니었다.

키는 갑절이나 커졌고옛날 발그스름하던 둥근 얼굴은 누렇게 윤기가 없어졌다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여 있고눈도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언저리가 온통 벌겋게 부어 올라 있었다바닷가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하루 종일 불어닥치는 바닷바람 때문에 대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는 너덜너덜한 털모자를 쓰고몸에는 얇은 솜옷을 걸치고 있었다초라한 온몸이 추위 때문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손에는 종이봉지 하나와 기다란 담뱃대를 들고 있었다그 손 역시 내가 기억하고 있던통통하고 혈색이 좋은 손은 아니었다거칠고 금이 가고 여기저기가 터져서 마치 소나무껍질 같았다.

나는 이 때 너무 흥분하여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룬투 형 이제... 오셨구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이 꿰어 놓은 구슬같이 계속 터져나올 것 같아다꿩이며날치며조개껍질오소리... 그러나 어쩐지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그 말들은 머리 속에서만 빙빙 돌 뿐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얼굴에는 기쁨과 처량함이 섞인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그는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마침내 그는 더욱 공손한 태도를 취하더니 분명히 이렇게 불렀다.

"나으리!"

나는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우리 둘 사이에는 이미 두꺼운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그 슬퍼해야 할 장벽 말이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쉐이성(水生)나으리께 인사를 드려라."

그는 자기 등뒤에 숨어 있던 어린 아이를 앞으로 끌어냈다그 아이야말로 20년 전의 룬투 그대로였다단지 안색이 나쁘고 비쩍 마른데다 목에 은 목걸이가 없을 뿐이었다.

"이놈이 다섯째 놈입니다아직 세상 구경을 못해서 그런지 비실비실 낯만 가리고..."

어머니와 흥얼이 이층에서 아래로 내려왔다아마 룬투의 말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룬투는 어머니께 말했다.

"마나님보내주신 편지는 벌써 받았습죠정말 어찌나 기뻤는지나으리께서 돌아오신다는 것을 알고..."

"룬투 자네 왜 이렇게 서먹서먹하게 인사치레를 하나자네들 옛날에는 서로 너너 하고 부르지 않았나옛날같이 그냥 쉰이라 부르게나."

어머니는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나님두 무슨 말씀을... 그게 될 법이나 한 얘깁니까그땐 철없는 어린 아이여서 아무 것도 모르고..."

룬투는 이렇게 얘기하면서 또 쉐이성에게 이리 와 인사를 드리라고 했다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부끄러하면서 저의 아버지 등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 애가 쉐이성인가다섯째랬지모두 낯선 사람뿐이니 겁을 내는 것도 당연하지얘 훙얼아네가 쉐이성이랑 같이 밖에 나가 놀아라."

훙얼은 이 말을 듣고 쉐이성에게 손짓을 했다쉐이성은 그제서야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훙얼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룬투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셨다그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겨우 자리에 앉았다그는 자리에 앉아 긴 담뱃대를 탁자 옆에 기대 놓더니 종이봉지를 앞으로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겨울이라서 변변한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건 푸른 콩을 말린 것인데정말 변변찮지만 그래도 저희 집에서 말린 것이라서 나으리께서 맛이라도 보시라고..."

 

 

 

4. 땅 위의 길을 걷는 희망 

 

 

나는 그가 사는 형편이 어떤지 물었다그는 그저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말이 아닙니다여섯째 놈까지 나서서 집안 일을 거드는데도 먹고 살 수가 없어요... 세상 공기는 온통 뒤숭숭하고... 무슨 이유도 없이 여기저기서 돈만 마구 거둬가고 ... 그러니 버는 게 형편이 없죠게다가 소출은 점점 나빠져요농사를 지어서 짊어지고 가서 팔려고 하면 세금만 몇 번씩 내야 합니다그러니 본전만 까먹고 말죠그렇다고 팔지 않고 두자니 그냥 썩혀버릴 형편이구요..."

그는 머리를 흔들어댔다.

숱한 주름살이 새겨져 있는 룬투의 얼굴은 마치 석상처럼 전혀 표정의 화가 없었다그가 느끼는 감정은 오직 괴로움뿐이다그런데 그것을 표현하려 해도 표현할 방법이 없는 듯했다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이윽고 담뱃대를 집어들고 묵묵히 빨았다.

어머니가 물어보자 그는 집안 일이 바빠서 내일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그가 점심도 먹지 않은 것을 알고 어머니는 부엌에 가서 손수 밥을 볶아먹도록 일렀다.

그가 나간 뒤어머니와 나는 그가 사는 형편을 이야기하며 탄식했다자식들은 많고농사는 해마다 흉작이고 세금은 가혹하다군인강도떼벼슬아치들지방 토호 그런 따위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그를 괴롭혀 마치 장승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어머니는 우리가 가져가지 않아도 될 물건은 모두 그에게 주어서 그가 갖고 싶은 걸 직접 고르게 하자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오후에 그는 몇 가지 물건을 골랐다기다란 탁자 두 개의자 네 개향로와 촛대 한 벌씩 그리고 짐을 짊어질 대 쓰는 가로대 한 개였다 그는 또 재(우리 고향에서는 밥을 지을 때 짚을 땐다그리고 그 재는 모래밭에 뿌리는 비료로 쓴다)를 전부 달라고 했다우리가 떠날 때에 배로 실어 가겠다는 얘기였다.

밤에 룬투와 나는 또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얘기를 나눴다그러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잡담일 뿐이었다다음 날 아침 일찍 그는 쉐이성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아흐레가 지났다바로 우리가 떠나야 할 날이다룬투는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 있었다그러나 쉐이성은 데려오지 않고 그 대신 다섯 살짜리 계집애를 데리고 와서 배를 지키도록 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빴다그래서 룬투와 나는 다시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었다집으로 직접 찾아온 손님도 많았고전송하러 온 사람이것저것 물건을 가지러 온 사람전송도 할 겸 물건도 가져갈 겸 온 사람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로 붐볐다저녁 때 우리가 배에 오를 무렵에는 이 오래된 집에 있던 낡고 오래된크고 작은 온갖 잡동사니들은 마치 빗자루로 쓸어버린 것처럼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우리의 배는 앞으로 나아갔다양쪽 강기슭에 줄지어 서 있는 푸른 산들은 황혼빛에 검푸르게 물들고 있었다그 산들은 하나씩 하나씩 배 뒤쪽으로 사라져갔다.

훙얼은 나와 함께 선창에 몸을 의지하고 바깥의 아스라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그 아이는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큰아버지우리 이제 언제 돌아와요?  

"돌아와너는 어째서 가기도 전에 돌아올 생각부터 하는 거냐?"

"하지만쉐이성이 자기 집으로 놀러오라고 나와 약속했는걸..."

훙얼은 크고 새까만 눈을 똑바로 뜨고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나와 어머니는 갑자기 멍해졌다그리고 다시 룬투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그 '두부집 서시'라는 양씨네 둘째 아주머니는 우리 집이 이삿짐을 챙기면서부터 매일같이 꼭 찾아왔다고 한다엊그제 그 여자는 잿더미 속에서 접시와 그릇을 열 몇 개씩 찾아냈다는 것이다그리고 룬투가 재를 나를 때 함께 가져가려고 숨겨둔 것이라고 따따부따 떠들어댔다고 한다.

양씨네 아주머니는 이 발견으로 마치 큰 공이라도 세운 것처럼 자랑하며 '구기살(狗氣殺우리 고장에서 닭을 기를 때 쓰는 도구이다나무판 위에 창살을 치고 그 속에 모이를 넣어두면 닭은 목을 길게 뽑아서 쪼아먹을 수 있지만 개는 그럴 수가 없어서 그저 바라보며 속을 태울 뿐이다)'을 집어들고 쏜살같이 달아났다는 것이다어머니는 전족을 한 그 여자가그렇게 뒤축을 높인 신발을 신고 어쩌면 그렇게 빨리 뛰어가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옛 고향집은 내게서 점점 멀어져갔다그만큼 고향의 산천도 점점 멀어지며 작아졌다하지만 나는 아무 미련도 느끼지 않았다나는 단지 보이지 않는 높은 담이 나의 주위를 둘러싸여 나를 외톨이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그리고 나는 뭔가 헤아리기 힘들게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 수박밭에서 은 목걸이를 한 걸고 있는 작은 영웅의 형상은 무척 뚜렷했다그러나 이제는 그것조차 갑자기 흐릿해졌다이것 역시 나를 무척 슬프게 했다.

어머니와 훙얼은 모두 잠이 들었다.

나도 자리에 드러누웠다그리고 배 밑바닥에 부딛히는 잔잔한 물소리를 들으며난 내가 나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생각해보면 룬투와 나는 이미 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우리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아직 하나로 이어져 있다훙얼이 바로 쉐이성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난 그 애들이 또다시 나와 같은 단절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마음을 잇기 위해 모두 나처럼 괴롭게 이곳저곳 떠도는 생활을 하는 것도 결코 원하지 않는다.

또 그 아이들이 모두 룬투처럼 괴롭고 힘들어서 마비된 것 같은 생활을 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괴로워하면서 생활을 포기하고 방탕하는 것도 역시 바라지 않는다그 아이들은 마땅히 새로운 생활을 가져야 한다우리가 아직 경험해본 일이 없는 그런 생활 말이다!

나는 희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갑자기 무서워졌다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달라고 했을 때나는 그를 속으로 우습게 여겼다그가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고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는 희망 역시 내가 직접 만들어낸 또 하나의 우상이 아닌가

단지 그의 희망이 보다 현실에 가깝고 절박한 것인 반면나의 희망은 더 막연하고 아득하게 멀다는 차이일 뿐이다.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나의 눈앞에 파란 바닷가 모래사장이 펼쳐지는 을 보았다짙은 쪽빛 하늘엔 동그란 황금빛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없다고도 할 수 없다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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