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수필문학가협회 2017년 8월 월례회가 한국교육원 102호에 열렸습니다

위진록 선생님을 모시고 '글쓰기가 나에게 있어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이 있었습니다

아래는 강의 내용입니다 (강의 중 받아 쓴 것입니다)

 

위씨가 특이한 성입니다.  우 선생이라 부르는 분이 많은데 위진록입니다

가디나까지 저를 픽업해 주신 김석연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김화진 회장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여러가지 주제를 주시면서 강의를 부탁하셨습니다

글쓰기가 나에게 있어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어떻겠냐고 하셔서 승낙하였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 가서 대통령이 주최하는 6.25 참전용사를 위로하는 행사에 가서 간단한 스피치를 하였습니다

대통령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게 이 행사의 리허설을 3번이나 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미주한국일보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글쓰기가 나에게 의미와 보람을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쓴 글이 감동을 줄 수 있는 한 분만 있으면 글쓰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생명이라는 단어가 떠 올랐습니다

나이가 들면 소김해지고 생각한 것 또 생각하게 되는데 마침 김화진 선생님께 이런 마음을 전해드렸습니다

제가 얘기하는 중에 삼천포로 빠지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함께 글을 쓰는 동지로서 말입니다

 

저는 일제때 태어났는데 한글을 배운 적이 없고 글쓰기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배운 것은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가 전부였습니다

일본말만 쓰도록 강요받았습니다  17살 때 해방될때까지 한글을 몰랐습니다

저는 당시 역부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역에서 대합실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청소도구도 변변찮았는데 침 뱉는 통을 치우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는 신의주에서 소학교를 다녔습니다

선생님께서 나라에서 돈을 주는 사범학교가 있으니까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아주 입학하기 힘든 5년제 학교였습니다 국민학교 졸업하고 바로 들어갈 수 있는 학교였는데 15살 때 담배 피고 포도주 사먹고하다가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 이후로 17살때까지 막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릴 때 어떤 책이 좋은 것인지 고르는 걸 배웠습니다

일본 작가 소설을 읽고 톨스토이 헤르만헤세 로망 롤랑을 막일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특히 로망 롤랑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읽고 감명 깊었습니다

해방이 되니까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는데 저는 이상하게 기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인생을 어떻게 살지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박종화 이태주 김기림 홍명희 김유정 이상의 작품을 미친듯이 읽었습니다

1946년 겨울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도전했습니다

비록 낙방했지만, 대학 졸업하는 논문을 한글로 써 주는 일도 했습니다

1947년 초여름에 진공관 라디오에서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여자가 음악을 배경으로 시를 낭송했습니다

'다발 다발 꽃다발 ...... '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중 안단테 칸타빌레였습니다

저는 그 때 방송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멜로디의 천재였습니다

 

얼마 뒤 방송국에서 성우 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습니다

학교 졸업장이 필요했습니다

북에서 온 선배에게 부탁했더니 등사기로 졸업장이라고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신청서를 냈습니다

 

화신백화점에서 탑골 공원까지 가는데 임시정부 요인이 입국한다는 벽보가 쭉 나붙었습니다

이 벽보를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성우 시험은 문제 없이 합격되었습니다

함께 합격한 친구가 장민호였습니다  4년전에 죽었습니다

다른 친구는 조남사였습니다

19살때였습니다

입사후 방송극을 했습니다

맨처음 주역이 똘똘이의 모험의 아저씨역이었습니다

비하인더 뉴스 , 해설 등등 여러가지를 했습니다

얼마 전에 사우스베이 지역에서 방송 관계자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때 구민을 만났습니다 . 그가 말하길 "선생님, 제가 똘똘이였습니다"

 

아나운서가 방송의 꽃임을 알았습니다

아나운서 시험을 쳐 보겠다고 방송국에 얘기했습니다

논문을 쓰라고 하면서 한시간을 주었습니다

논문 제목은 "방송의 시대적 사명'이었는데 , 제겐 힘들지 않았습니다

3명 모집에 150명이 왔는데 , 제가 최고점을 받아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5.10선거 중계방송 , 김구 서생님 장례 방송 , 6.25 방송 , 9.28 서울 수복 방송등등을 했습니다

1948년 KBS에서 전국적으로 라디오 드라마 각본 공모에 방송극을 썼는데 , 단독 입상하면서 방송극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9살때였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담당한 것은 저 하나였습니다

차이코프스키 작곡 이라고 말하는게 쉽지 않았는데 , 많은 사람이 "차이코프스키 작키'라고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1950년 전쟁 때 일본에 유엔군 방송부에 한달 파견되었습니다

전쟁이 한 달 안에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 냉정이 이어지면서 22년 동안 아나운서를 하면서 방송극을 썼습니다

한 달에 한편을 썼습니다

명곡의 향연이라는 프로를 만들었습니다

 

라디오 드라마는 목소리로만 전달하기에 , 방송극 한편을 쓰는데 고생이 많았습니다

지금이야 동영상으로 얼굴도 보고 하지만 , 라디오 드라마에서는 꼭 맞는 어휘를 찾는데 무척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제가 쓴 글이 쉽고 따뜻하게 명쾌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저의 문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분이 알아주면 그게 저의 글쓰는 보람입니다

 

(위진록 선생님께서 프린트물을 준비해 오셨습니다 - "여보! 나 돌아왔어요"라는 글을 직접 읽어주셨습니다 .  마치 라디오 방송을 하시듯이 직접 준비해 오신 태이프 리코드로 배경 음악과 함께)

 

방금 들어신 음악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바이얼린 협주곡이었습니다

저의 아내가 난소암으로 투병했습니다

투병을 아주 잘 했는데 , 투병 시작할 때 120파운드였는데 , 죽을 때는 122 파운드였습니다

아내는 한국 최초의 티브이 아나운서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쉽고 평이한 언어 , 그리고 문장의 리듬 같은 걸 느끼셨다면 이 수필은 성공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장에서 리듬과 음악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 이걸 흥미있게 얘기하는 사람이 무라카미 하루키입니다

한국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작가입니다

그가 어느 책에서 오사와 세이지를 언급합니다 

오사와는 지휘자입니다

오사와 세이지와 대화한 책이 나왔습니다

 

교보문고 통계를 보면 베스트셀러 10권 중 5권은 일본인이 쓴 책입니다

 

책에서

"저는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 저는 음악에서 글쓰기를 배웠는데 , 바로 리듬입니다 . 내재적인 율동이랄까 .....

기계 설명서가 딱딱한 이유는 거기에는 리듬이 없기 때문입니다 .  "

 

사람이 살아 있는 곳에는 리듬이 있습니다

심장 박동 , 맥박 ......

문장이 잘 되어 있어도  살아있는 리듬이 없으면 죽은 문장이나 다름 없다

뭔가가 다가오는 것 ..... 심금을 울리는 것 ......

 

제가 가끔 수필 심사를 요청받습니다 . 많은 수필 중에서 골라내는 것인데 , 걸러서 걸러서 남는 잘 된 글 중에서는 리듬 같은 것 , 다가 오는 것이 있는 작품을 뽑습니다

리듬이 그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라벨의 볼레로를 들으면 리듬감이 뛰어납니다

문장에도 그런 리듬이 있으면 합니다 . 조금 무리한 부탁이 될 수도 있게지만요 .

 

지금도 일주일에 한권의 책을 읽습니다

일본인이 13.7% 라면 한국인은 0.6%라고 합니다 . 책 읽는 비율입니다

 

1971년에 이민와서 사우스베이 허모사비치에 살았습니다

아주 보수적인 도시입니다

아무렇게나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조그만 햄버거 가게에서 했습니다

"차이니즈 !  " 혹은 "렉 빠 (문둥이)" 라고 외치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7년 후에 그 소리치던 아이들이 "Hi, Mr. Wee" 라고 외쳐습니다

이 이야기를 담은 것이 하이 미스터 위 라는 수필집입니다

 

서점을 토랜스에 오픈했는데 , 햄버거 장사로 번 돈을 다 써버렸습니다

장소현씨의 조언으로 신문을 한 5년 했습니다

아내 떠나고 책을 쭉 썼습니다

인생의 마디마디에서 글을 쓰고 희로애락을 기록했습니다

 

한때는 주례를 많이 섰는데 , 부부 선서할 때처럼 글을 썼습니다

글이 나에게 있어 그런 존재가 아닌가

글이 붓가는 대로 쓴다고 하지만 그렇게 쉽나요

20년전에 자카란다란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중앙일보 "이 아침에" 에 제가 처음 글을 썼습니다

자카란다 꽃을 처음 보고서 저는 꽃으로 보지 않고 색채로 보았습니다

뿌리는 만져보기도 하고 꽃잎도 만져보았습니다

뿌리가 굉장히 부드럽습니다

보라빛 색채는 가엽게 산 한국의 여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여자 숭배자입니다

 

제가 코로나에 살 때 , 어느 화가가 자신의 집에서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가 보았습니다

대작들이 집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집 주인과 인사했는데 , "제가 위진록입니다" 라고 했는데 , 집의 안주인이 "자카란다"라고 나지막히 소리내어 말했습니다

저의 글 '자카란다'를 기억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읽어 주면 좋겠지만 , 적은 사람이 읽어 주는 것도 너무 고맙습니다

 

내가 생명 같이 생각하는 것이 글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오만이 아닙니다

글쓰는 일은 다른 예술 활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글이라는 것은 사람됨됨이라고 합니다

 

수필은 시대에 따라서 변천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수필은 청자 연적이요 학이요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요 ........."  했는데 , 지금은 서정적인 것과 학문적인 것이  너무 가까워졌습니다 

지금은 기승전결을 많이 애기하듯이 그건 리듬을 말합니다

 

남의 글을 읽을 때 꼼꼼히 읽어주세요

 

옛날로 돌아가실 필요 없습니다

새로운 수필의 세계를 개척해 주십시요

감사합니다

 

(상기 강의는 여준영 부회장이 요약하였습니다 . 세세한 부분까지 받아 적지 못한 부분이 있사오니 , 이 점 양해하시어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의가 끝나고)

조옥동 선생님깨서 위진록 선생님의 수필 "여보! 나 돌아왔어요"에서 '유리 너머로 웃고 있는 사진속의 얼굴에 다섯손가락을 댄다' 라는 구중에 '다섯손가락'을 언급하셨습니다

보통은 손바닥을 댄다라고 쓰는데, 다섯손가락이라고 표현하니 그 느낌이 더욱 애잔하다고 하셨습니다

 

8월 생일회원 축하가 있었습니다

조만연 선생님 

박신아 선생님

두 분께 축하를 드렸습니다

 

 

공지 사항 (자세한 사항은 사무국장님께 문의해 주세요)

1) 임지나 회원님 부군상

2) 재미수필문학상 

     등단 10년 이상

     2년내 문예지 신문 지상에 발표한 수필 5편

     자천 혹은 타천

     9월 30일 마감

 

3) 제12회 신인상 작품 공모 마감 : 8월 30일

 

4) 8월 22일 피천득 선생님 관련 특강 

    3030 Wilshire Blvd. 30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