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데팡스의 불빛 / 맹난자

 

 

 

   파리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두 곳에서 체재했다. 처음 일주일은 고전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몽파르나스 근처였고, 그 후 집을 얻어 나간 곳은 전위적인 신도시 라데팡스였다. 샹젤리제 대로의 개선문을 빠져 나와 그 뒤로 곧바로 뻗어 있는 그랑드 아르메 대로를 지나 센 강을 건너면 바로 거기가 라데팡스 지역이다. 저마다 특색 있는 건축물로 군을 이룬 고층 빌딩가임에도 한적하고 매우 아늑했다. 우리는 새천년 5, 인생의 마지막 축복처럼 거기에 있었다. 인생의 길을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어느덧 멈춰 서게 된 나이, 정년停年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하게 된 일이었다. 열흘 간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우리 내외는 파리에서 주저앉았다. 개선문이 서 있는 에투알 광장을 중심으로 좌측에 빅토르 위고와 폴 발레리가 만년을 살다가 숨을 거둔 집이 있고, 보들레르가 어머니의 품에서 숨을 거둔 정신병원이 있었다. 애인의 이름이나 되는 것처럼 그들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주소만으로 발품을 팔아 가며 그들의 연고지를 찾아 파리 시내를 헤매었다. 숙소로 돌아오면 밤마다 준비해 간 자료들을 들춰 보고 아침이면 등교하는 학생처럼 서둘러 집을 나서곤 했다. 프랑스 작가들에 관한 기록은 내 몫이고 남편은 주로 미술관 자료를 챙겼다.

  2000519, 이른 조반을 마치고 우리를 데리러 오기로 한 친구들을 기다렸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가기로 한 날이었다. J군은 알베르 카뮈를 전공하는 불문학도였고, 친구 딸은 시각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아침부터 가는 비가 조금씩 뿌렸다. 우리는 승용차로 시간 반가량 걸려 파리 북부에 있는 오베르에 닿았다. 빈센트 반 고흐가 숨을 거두던 날의 정황을 알고 있었기에 가슴이 조여 왔다.

  50여 년 전쯤 되는 것 같다. 갓 대학생이던 시절, 일본 문고 판화집으로 고흐와 처음 만났는데 그때 본 <슬픔(悲しみ)>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왠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었다.

  무릎 위에 팔짱을 끼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늙은 나부裸婦의 연필 스케치였다. 구부린 등으로 흘러내린 윤기 없는 머리칼, 볼품없이 처진 유방 아래로 불룩한 배. 무어랄까. 암컷의 비애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주던 그림이었다. 고흐와 창녀 시엔과의 일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 일이었다. 고흐는 늙고 병든 창녀와 동거 생활을 서슴지 않았다. "그녀와 있을 때가 제일 마음이 편해."라던 말이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흔들었던 것이다. 그때 "왜 창녀가 성녀聖女인 줄 아십니까?"하고 '창녀가 성녀'라고 목소리 높여 '성녀론'을 외치던 어느 화백의 말이 떠올랐고, 창녀의 '성녀론'은 이내 고흐와 로트렉의 이름을 연관지어 떠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선의 화가 툴루르즈 로트렉이 앙보와즈의 매음가에 드나든 것은 28세 때부터다. 몽마르트르 물랭 가에 새로운 고급 창가娼家가 생기자 그는 아예 그곳으로 이사해서 창녀들 속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창가가 그의 집이자 아틀리에였던 것이다. "어디보다도 여기 창가娼家에 있을 때가 제일 마음 편해져."라던 로트렉의 그늘진 얼굴도 떠오른다. 그는 사창가에 파묻혀 살면서 그녀들의 편지를 대필해 주고, 신세타령을 들어주고, 술 파티도 열어 주었다. 그리고 50여 점이나 되는 작품 속에 창녀들의 모습을 담았다. 손님과 자는 모습, 검진을 받는 모습, 속옷을 벗는 모습 등 노골적인 부분까지도 꾸밈없이 그려 나갔다.

  로트렉은 살아 움직이는 대상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어려서 골절상을 입고 하체가 발육 정지된 기형의 불구자여서 그랬을까? 튼튼한 다리를 가진 말이라든지 캉캉을 추는 무희, 카페나 댄스홀, 사창가, 서커스, 극장 등을 찾아다니며 재빠르게 움직이는 동작들을 냉담한 시선으로 열심히 그려 나갔다. 케리커처적인 데생 기법을 완성된 물랭루주시리즈와 서커스 시리즈가 아직도 전해진다. 로트렉이 그린 창녀들은 타락한 여자도 아니고 구제받아야 할 인간도 아니며, 다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창녀'일 따름이라고 한다. 대상으로서의 냉철한 표현을 추구했다는 것이 되리라.

  그러한 반면 화가 루오는 창녀들의 추악한 모습을 그려 그것을 묵인하는 사회에 대한 고발 정신을 거기에 포함시켰다. 그런가 하면 고흐는 렘브란트가 그린 매춘부의 초상화에는 신비스러운 미소가 특유의 무게를 갖고 아름답게 포착되어 있다면서 그를 미술가 중의 미술가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흐는 네델란드의 선배 화가인 렘브란트에게 경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흐가 그린 매춘부 시엔에게서는 루오의 추악함도 아닌 렘브란트의 아름다움도, 로트렉의 창녀다움도 아닌 한 여자의 운명적인 슬픔을 나는 그때 전해 받았던 것이다.

"빌어먹을, 벽은 너무나 춥고 나는 지금 여자가 필요하다."라고 동생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은 고흐의 나이 28세 때, 그는 어느 추운 겨울날, 거리를 헤매고 있는 여자 시엔과 만난다. 그녀는 병들고 임신한 데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만삭의 여인이었다. 고흐는 편지로 동생에게 알렸다.

  나는 진심으로 시엔을 좋아하고 그녀 역시 그렇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들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진 짐을 나누어 지고 있다. () 시엔을 만나지 않았다면 마법에 풀려 실의에 빠졌을 것이다. 그녀와 그림이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 시엔은 화가가 겪어야 하는 자잘한 고생을 도맡아주고 모델이 되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비록 그녀가 케이(약혼녀)처럼 우아하지도 않고 예절도 잘 모르지만 선의와 헌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나를 감동시킨다. ()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때에 그녀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녀를 계속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는 다시 과거의 길, 그녀를 구렁텅이로 내몰 것이 분명한 그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나 시엔과의 관계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다섯 명의 애들이 딸려 있었고, 고흐는 몹시 빈곤했으며, 그해 6월 병원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3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고흐는 서너 차례의 청혼을 한 일이 있건만, 하숙집 딸에게서도, 사촌인 케이에게서도 모두 거절을 당했다. 연상의 어느 여인과도 사귀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결혼의 꿈은 종내 이룰 수 없었다. 가난 말고도 그는 간질성 발작의 지병을 갖고 있었다. 만일 고흐가 지병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또한 가난 때문에 청혼을 거절당하는 일조차 없었더라면 시엔과 사귀에 되었을까? 마찬가지로 로트렉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신장 137cm의 기형님.) 어떠했을까? 인생의 실격자라는 패배 의식이 없었다고 해도 그는 창녀들과 어울렸을까? 그러나 이미 그건 어리석은 질문일지 모른다.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아.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더라면 난 결코 그림 따윈 그리지 않았을 거야.' 하던 그의 말이 모든 것을 답해 주고 있지 않은가. 운명은 이미 선택 이전의 것이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또한 혈족 혼인의 피해가 없었더라면 그런 허약 체질은 물려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기에.

  매춘부 시엔과 고흐, 그리고 창녀들과 로트렉, 그들의 교합은 어쩐지 마른 장작처럼 완전연소로 타오르지 못하고, 젖은 습목의 그것처럼 미완으로 남아 그들의 생애와 맞물려 사람의 마음을 젖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느새 발걸음은 그의 집에 다다랐다. 반쯤 열려진 붉은 철제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담쟁이덩굴은 '반 고흐의 집'이라는 글자만 남겨 놓고 벽을 온통 뒤덮어 버렸다. 개장 시간은 930, 근처 카페에서 쁘레소를 주문하고 30분을 더 기다려야만 되었다. 오베르는 아주 작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고흐가 이곳으로 온 것은 18905월 중순이라고 하니, 우리가 고흐를 찾은 계절과 같은 무렵이다. 그가 즐겨 그렸던 보라색 붓꽃이 오베르 교회 앞에서 한창이었다. 생 레미 요양원에 가 있던 형을 테오가 파리로 부른 것은 1890517. 동생의 형편이 몹시 어려워진 것을 안 고흐는 곧바로 이곳 오베르로 떠나오게 되었는데 라부의 여인숙에 머물면서 화가이며 의사이기도 한 가셰의 치료를 받으며 그는 그림에만 몰두했다. 오베르에서만도 60점에 가까운 유화를 제작했고, 30점의 수채화와 드로잉도 남겼다. 거의 하루에 유화 한 점 꼴인 놀라운 성과였다.

  2층 기념품 가게에서 방명록에 사인을 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밟아 오르는 순간, 알 수 없이 가슴이 조여 왔다. 무엇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담벼락에 페인트칠이 벗겨진 자리에 지그재그로 난 균열은 불안한 그의 영혼을 보는 듯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숨죽이며 고흐의 방으로 들어섰다. 한쪽 모서리가 깎여진 아주 작은 다락방이다. 참담했다. 달랑 의자 하나가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언젠가 그의 그림에서 본 '울고 있는 노인'이 앉아 있던 바로 그 의자인 것 같아서 거기에 앉아 나는 사진을 한 장 남겨 왔다.

  이 방에서 일어난 일들이 순간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파리에서 달려온 동생에게 '총상은 실수였다.'고 고흐는 말했지만 사실은 계획된 죽음이었다. 그 무렵 고흐의 손에서는 자꾸만 붓이 미끄러져 나갔다. 그런 손으로 고흐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오베르의 교회>를 완성했다.

  "남에게 욕이 되고 귀찮은 존재가 된다면 차라리 나는 죽음을 택할 것이다. 고통을 불평 없이 참아 넘긴다는 것은 인생에서 오로지 배워야 할 유일한 점" 이라던 그의 육성이 들리는 듯해서 침묵 속에 고개를 숙이고 잠시 서 있었다. 얼굴이 굳어진 우리의 일행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붕으로 난 작은 들창과 마룻바닥, 나는 눈으로 고흐의 침대를 창가에 놓아 보고 그 옆에 테오를 앉혀 본다. 밤이 내리고 방안에 단둘만 남게 되자 형제는 브라반트에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조용히 나누기 시작한다. 새벽 1시가 조금 지났을 때, 고흐가 약간 고개를 돌리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테오, 난 지금 죽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몇 분 뒤 그는 눈을 아주 감았다. 729일의 일이다. 그의 유해가 오베르 교회 앞을 지나서 비탈길을 올라, 자살하기 며칠 전에 그렸던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의 현장인 보리밭을 지나 마을의 공동묘지를 따라 올라갔을 그의 마지막 발걸음을 쫓아 나도 그렇게 묘지에 이르렀다. 왼쪽엔 고흐가, 오른쪽엔 테오가 팔을 뻗으면 손을 맞닿을 자리에 이들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내 귀엔 나직한 고흐의 음성이 들려왔다.

"테오야.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을 꼭 갚겠다. 안 되면 영혼을 주겠다."

이승에서 갚지 못하면 영혼을 주겠다던 형과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의 묘비 가운데 서니 자꾸만 콧마루가 시큰해왔다.

 형이 떠난 지 반 년 만에 이곳에 따라와 묻힌 테오!

  헤어질 날이 언제일지 모르나 우리 두 사람도 이들 형제와 같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고흐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집까지 들렀다. 수련이 한창 아름다운 정원과 그림들을 감상하였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의 환경, 상대적으로 고흐의 절망감이 더 아프게 느껴졌다. 그리고 '금욕적'이라던 고흐의 금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던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동생에게 편지를 이런 고초를 털어놓았다.

  테오야, 모파상의 소설에 등장하는 토끼 사냥꾼을 기억하니? 10년 동안 사냥감을 쫓아 열심히 뛰어다녀서 녹초가 되었는지, 결혼할 생각을 했을 때는 더 이상 그게 서지 않던 사람을. 그 때문에 그는 아주 초조해지고 슬퍼했지. 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육체적으로 나는 그와 비슷해지고 있다. 뛰어난 선생 지엠에 따르면 남자는 더 이상 발기할 수 없는 순간부터 야망을 품게 된다고 하더라. 그런데 발기하느냐 마느냐가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면 나는 야심을 품을 수밖에 없지.

  그의 나이를 헤아려 보니 겨우 서른다섯 살이었다. 이것이 죽기 이태전의 편지였다. 성에 대한 욕망과 발기 능력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지만, 서른다섯 살의 좌절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 아닌가.

오베르를 다녀온 날 밤, 나는 쉬이 잠에 들지 못했다. '야심'이란 살아있다는 또 다른 이름의 생명력의 실천이 아니겠는가. 갑자기 나는 이 말이 떠올랐고 생명이라는 낱말 앞에는 속절없이 목 메이는 것이었다. 창문에 어른거리는 불빛 아래 곤히 잠들어 있는 남편의 모습이 왠지 오늘따라 낯설어 보인다. 깊게 팬 눈가의 음영, 어느새 시들어 버린 생의 열정. 언제 이런 나이에 이르렀는가.

  며칠 전의 일이다. 기념관이 된 '들라크루아의 집'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생제르맹 대로로 나와 카페 '프롤르'를 지나는데 책 가게의 '화집 세일'이 눈에 띄었다. 그에게 책 한 권을 골라 선물했다. 에로틱한 나체화로 꾸며진 에로이카 유니버설이었다. 책장을 들추니 쿠르베의 '나부'를 비롯하여 고갱과 피카소가 그린 성희性戱, 살바도로 달리 엥그르 로트렉 드가 도미에 밀레 로댕까지도 성을 주제로 한 그림이 거기에 집합되어 있었다. 힌두 사원의 벽화와 에로틱한 캐리커처의 자극도 그에게는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단 말인가.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던 돌발적인 기습 따위는, 그런 장난스런 막무가내는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아득한 일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동안 남편이 그림을 그려 온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학교에서 퇴직하던 날, 가져온 짐 속에 들어 있던 그림을 보고서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차 남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연습 삼아 혼자 그려보았노라는 수줍은 그의 변이 이어졌지만 그것은 끝내 현실로 다가왔다. 어쩔 수 없이 이제부터는 시간을 죽여야 하는일이 시작된 것이다.

 과연 우리가 살아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가끔 생각하게 된다.

 시간의 효용성을 운위하며 거기에 알맞은 의미를 부여하지만 실은 모두가 덧없는 구실만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 있지 않은가.

  아침마다 눈을 뜨면 맞게 되는 하루, 축복의 보너스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 하루해가 조금씩 겨워지기 시작한다. 장거리 여행도 이제는 조심스럽다. 다행히 그 무렵 파리에 있을 때는 고취된 의욕에 건강이 따라주었다. 고통으로 점철된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삶의 광휘를 보태 주었다. 그 모두가 고통의 늪지에서 피워 낸 꽃들이었다. 나는 그 고통을 생각하며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숨찬 붓 놀림, 그의 그림을 보노라면 불꽃같이 휘돌아 치솟는 형상에서 어떤 억압된 분노가 분출되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전해 받곤 했다. 그것은 더 이상 남자로서의 욕망이 멈추어 선 자의 변형된 또 다른 성의 에너지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남편의 그림 그리기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였을까에 생각이 이르자, 갑자기 뜨거운 무엇이 목안에서 치솟는다. 지척에 있으면서 나는 그에 대해 과연 무엇을 안단 말인가"

타자他者, 이체이심異體二心의 타인.

개체個郞란 어차피 독립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순간 존재의 고립감이 뼈끝에 와 닿는다.

 창 밖에 에트랑제로 서 있는 저 라데팡스의 축축한 수은등 불빛 아래. 나는 밤 내 그것과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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