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끝에 걸린 초가삼간 / 홍도숙 

 

 

  "얘들아. 도랑 건너 집에 개초(이엉을 새로 이는 일)하는 날인데 이삭 주으러 가자." 장난스러운 박새 한 마리가 앞장서서 휑하니 날아가자 이내 졸개들이 왁자지껄 뒤따른다. 굳이 개초하는 데까지 가서 이삭줍기를 안 해도 먹을거리가 지천인데 새들은 사람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어쩌다 탈곡할 때 덜 떨어진 몇 낱 안 되는 나락을 이엉 엮는 볏짚에서 찾느라 지붕에 올랐다가 마당에 내려앉았다가 볏짚을 들쑤셔 놓고 파리떼처럼 성가시게 군다. 사람 발치에 차이면서도 개초가 끝날 때까지 주위를 맴돌며 떠나지 않은 것을 보며 이삭을 줍는다는 건 구실이고 사람 온기에 묻혀 지내고 싶어서가 아닐까.

  우린 언제부턴가 그 수더분하고 모나지 않는 둥글둥글 맘씨 좋은 하늘같은 지붕 모습을, 자연친화적인 볏짚을 얹은 가을빛깔의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들은 어디론가 아득한 곳으로 떠나가고 말았다.

  오랜 우리 주거문화의 모태인 초가가 그토록 서민들로부터 사랑받았던 이유는 1,2년에 한 번씩 지붕을 갈아주어야 하는 번거로움과 불에 약하고 썩기 쉬운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점 못지않게 볏짚은 가볍고 단열(볏짚 속의 구멍이 천연 단열재 역할을 한다.)및 보온성이 뛰어나 사계절이 뚜렷한 이 땅의 기후에 잘 맞는 재료였기 때문이리라.

  개초를 마친 초가지붕은 누르스름한 황금색으로 윤기마저 흘렀다. 초가의 이엉은 고기비늘같이 이엉에 턱이 지는 형태의 '비늘이엉'과 뿌리 쪽인 글커리가 밖으로 들어나지 않도록 매끄럽게 잇는 형태의 '사슬이엉' 그리고 이엉을 엮지 않고 그냥 펴서 얹는 형태의 '흐른 이엉'이 있는데 태반이 사슬이엉을 올렸다.

나중에 용마루에 덮을 이엉을 올리는데 양쪽에 날개를 단 모양으로 가운데는 양 나래를 틀어 엮어 매듭을 지었다. 용마름을 둘둘 말아서 ", 용 한 마리 올라간다!" 지붕 꼭대기를 향해 휙 던지면 마지막 단장을 하고 개초가 끝난다.

  이엉이 바람에 날라 가거나 뒤집히지 않도록 집 줄로 얼개를 엮어 매고 바람이 센 고장에선 짚 줄 끝에 무거운 돌멩이를 묶어 이엉과 지붕을 고정시킨다. 일손도 두세 사람이면 족하다. 마당에 서 지붕으로 던져주고 위에서 받아 빙 둘러 볏짚을 덮으면 되니까.

집을 지을 때도 여러 명의 목수가 달라붙는 기와집처럼 시끌벅적 요란하지도 않았다. 재료는 숲에서 베어 온 기둥과 들보와 서까래에 그저 주변에 널린 흙과 나무와 짚이면 되었다. 흙과 짚을 이겨서 바른 토담집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초가는 돈이 들지 않는 건축이었다. 가난한 이들이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우리 민족에게 짚이란 생명 또는 그 이상의 것이었을 것이다. 악귀와 질병, 액을 막을 때에도 어김없이 볏짚으로 만든 금줄을 둘렀던 것은 짚을 신성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리라.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혼이나 다름없는 쌀을 생산하는 볏짚이 더없이 신성한 것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볍씨를 뿌려 밥이 될 때까지 여든 여덟 번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쌀, 그래서 한자로 쓰는 미자를 팔십팔八十八을 합친 글자로 풀이한다는 이 말은 여든여덟 번의 손이 가기야 할까마는 쌀 한 톨 만들어 내기가 그만큼 힘이 들고 또 든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무수한 외세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지켜낸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 쌀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었으리. 조가는 바로 그 신성함을 지붕에 올림으로써 하늘을 표현했던 셈이다.

언젠가 종로거리를 지나다가 볏짚이엉을 한 오두막을 보았다. 노오란 볏짚이 눈에 상큼하여 가까이서 보니 주차장 매표소였다. 후덕한 짚을 머리에 인 벽면에 커다랗게 '유료주차장'이라 쓰여 있었다. 바지저고리 입은 촌로가 MI소총을 메고 있는 것 같았다. '자동차 쉬어가는 곳'이라 쓰면 좋았을 텐데, 볏짚 이엉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우리 지붕 위에 허술한 볏짚은 덮여 있지 않아도, 층층이 견고한 콘크리트 안에 갇혀 공중에 떠서 살아도, 해마다 개초할 걱정도 없이 편하게만 살아도, 산기슭에 둘레둘레 앉아 바람결에 볏짚 썩는 냄새를 맡으며 살던 초가삼간이 그립다.

  오늘같이 조용히 비 내리는 날, 내 초가삼간은 가스락가스락 개초한 볏짚으로 스며드는 빗방울 소리가 순하고 부드럽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새 이엉을 올리던 따뜻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람이 좋아 인가에서 때를 묻히며 살던 멧새들은 어디쯤에서 날개를 접었을까. 우리 이엉 얹는 날의 그 아늑하던 광경을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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