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E. N / 조재은

 

 

 

 

P의 언어는 향기로워 그 향기는 현실을 잠시 잊게 했다.

P의 얘기는 맑은 날보다는 흐린 날에 더 감미롭고 낮보다 밤에 더 잘 들렸다. 그는 감탄하거나 분노를 삭일 때,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을 때,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푸른 정맥이 드러나는 가늘고 긴 손가락에서 그의 감각적인 매력이 나타났다. 가끔은 짧은 몇 마디로 자신의 깊은 마음을 전하는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찰나의 눈빛을 붙잡아야 했다. 나는 항상 긴장하며 그를 응시했다.

 

P의 말은 절규로 들리기도 하고 통한의 신음 소리로도 들렸다. 이러한 감각적인 면에 이끌려 시작된 만남은 시간이 흐르자 감정의 올무가 되었다. 그의 감정에 휘말려 훼척해 가는 자신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약하지 않은 건강한 영혼의 소유자와 함께 길가의 꽃을 보며 미소 짓고, 낙엽 쌓인 길을 걸을 때는 낙엽에서 죽음을 느끼기보다 단풍의 색에 물들고 싶어졌다. 그를 떠날 때 칼날 같은 몇 마디 말이 가슴에 선혈을 흘리게 했지만, 삶의 한가운데서 건강하게 서 있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쓰러질 듯, 부서질 듯 서 있는 자코메티의 조각이 아닌 로댕의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그리웠다.

N과의 만남은 실내악 같던 P를 떠나고 교향악의 장중함에 매료되었을 때였다.

직장을 가진 사회인으로서 많은 계층의 사람들을 접한 N에게 듣는 삶이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새벽 생선 시장에서 맡는 비린내 같고, 노동하고 흘린 담 냄새 같았다. 현실의 한가운데서 나는 삶의 냄새였다. N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 끝없이 들려주었다. 어느 날 며칠이 가도 끝나지 않는 그 친구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주인공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그들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주인공들은 그의 어릴 적 친구가 아닌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계속 꾸며내야만 목숨을 부지했던 세헤라자드을 떠올렸다. 그는 영원히 글쓰기의 업을 지니고 태어나 목숨이 끝나야 비로소 벗어날 업의 무게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만나고 한동안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전해 주던 N은 시간이 흐르자 생의 더 짙은 어두움과 깊은 절망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일식이 계속되는 듯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 땅에는 영영 해가 떠오를 것 같지 않았다.

어느 전시회에선가 가슴이 뚫린 조각이 있었다. 청동여인의 뚫어진 가슴에 손을 깊게 넣어 보았다. 팔이 끝까지 들어 간 순간, 혈압을 잴 때 팔을 누르는 것 같은 압박을 느꼈다. 가슴이 조여 왔다.

허구에서 느껴지는 허무의 바람은 나를 땅속까지 끌고 갈 것 같았다. 허무와 생살이 닿는 아픔을 견딜 수 없었다. 언어로 표현될 때부터 진실의 존재는 흩어지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한 조각을 붙잡고 싶었다. 두 번째의 떠남은 처음보다 훨씬 힘들지만, 고여 있어 썩지 않으려면 떠나야 했다.

E는 햇빛 아래서 맑은 웃음으로 만나 주었다.

그 웃음은 삶의 상처를 딛고 내적 괴로움을 승화시킨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말은 진지했다. 그의 세상을 보는 눈은 따뜻하지만 날카로운 비평을 담고 있었다. 타인에 대한 평가는 편협하지 않고 부정적이지 않았다. 발은 대지를 튼튼히 딛고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있는 그의 삶의 태도에 신뢰가 간다. 자기만의 특수성을 찾으면서도 편견 없는 보편성을 가진 그에게서 온기를 느꼈다. 함께 있으면 느껴지는 편안함은 안이함이 아니다. 새로운 것이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각도 받아들이는 넓은 포용력 때문이었다.

그의 예술에 대한 관심과 학문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는, 그가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더 넓고 높은 곳을 향한 몸부림으로 보여 연민과 함께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게 했다. E는 삶에 대한 얘기를 미화하지 않고, 옷을 입히지 않은 알몸 그대로를 보여 주었다. 삶의 실제를 만난 듯했다.

E를 만난 후, P와 N에게서 느꼈던 혼란과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를 만나고 싶은 만큼, 그를 만나러 갈 때마다 나의 고통은 깊어졌다. 그의 탁월한 식견에 나의 보잘 것 없는 견해가 부끄럽고, 화려한 화술로 답변하기 바라는 그에게 어눌한 나의 말은 생각을 표현할 수 없어 쩔쩔매곤 했다. 그는 정치, 사회, 예술의 전 분야에 대한 박식함으로 만남을 즐겁게 해 주지만, 내 지식의 빈곤함은 지난날을 게으르게 보낸 회한에 주저앉게 했다.

E와 만날수록 깊이 느껴지는 나의 부족함은 P와 N을 만날 때보다 자존심에 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를 떠날 생각을 한 어느 날, E에게서 P와 N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갖고 있는 문학의 완성이 P와 N을 품음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다.

이제는 방황에 지쳐 어딘가에 정착을 해야 한다. 후회하지 않을 삶을 위해 E의 곁에 머물 것을 결심한다. 그와 함께 할 시간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가슴에 싸아한 아픔이 번진다.

시(Poem)와 소설(Novel)을 떠나보낸 몇 년 후, 나는 오늘도 수필(Essay)을 만나러 간다.

긴 고통 속에 숨어 있는 환희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