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론/김병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것은 신변잡사이다. 그것을 그냥 그대로 적으면 신변잡기가 된다. 우리는 신변잡기를 쓰고서 아주 흡족하다고 여길 수가 있을까?

 

적어도 거기에서 벗어날 때 인간은 어떤 흐뭇함을 느낄 것이다. 일상적으로 판에 박힌 생활을 하면서, 글도 숨통을 조금이라도 트게 할, 사소한 윤택미가 없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따분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일반적인 현상에서 자기만이 받는 충격과 경이가 느껴진다면, 그것은 보람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남들은 하찮게 보고 지나치는 것이나 작가는 거기서 인생의 중대한 모습을 발견하거나, 우주의 원리를 깨달을 수가 있다.

 

여기에 작가가 탄생한다. 롤랑 바르트는 작가(ecrivain)와 글쟁이(ecrivant)를 구별한다. 글쟁이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하여 언어를 이용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공동언어의 수호자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비(非) 지식적 언어, 혹은 전달 차단적 언어를 재료로 쓰는 사람이다. 작가는 말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떤 언어적 물질을 만들어내는 거인이다. 그는 의미 체계를 수단으로 삼지만 목적은 비(非) 의미 체계이다. 작가는 그 목적으로서 의미 체계 이상의 비 의미 체계를 갖고 있다. 글쟁이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이니까 일상적인 글투로 써야 한다. 거기에 어긋나는 표현을 하는 것은 되레 금물이다. 그러나 작가의 글은 다르다.

 

메를로 퐁티의 언어 이론을 들어 보자. 설사 편의라든가 안이함 때문에 예술가가 미리부터 설정된 의미 작용 속에 개입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의미 체계를 그 나름으로 배열함으로써 타인의 마음속에 그와는 다른 새로운 어떤 의미 작용의 예감을 불러일으킬 줄 아는 법이다. 그는 어떤 혁신적인 형상을 창조하고자하는 기도를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한다.

 

따라서, 그는 이미 경험한 형상, 즉 너무나 많이 사용해서 닳아버린 까닭으로 단순한 반복에 그치고 표현력을 고갈시킬 따름인 형상 속에 안주할 수는 절대로 없다. 신변잡기 같은 것이 그 전형적인 것이다. 거긴 균열이 생기고 이제는 충족감도 없는 채로 수동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문명을 거쳐서 새로이 태동하려고 발버둥치는 문명이 되고자하는 거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 있어서는 어느 때 보다도 이러한 자각은 건강한 것이라 할 것이다.

 

위대한 소설가란 무엇보다도 알려지지 않은 혹은 잘못 인식된 정서들을 창안 해내고, 그것을 자기 인물들의 생성으로 발현시키는 예술가라고,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철학은 무엇인가’에서 말한다.

 

에밀리 브론테가 히드 클리프와 캐서린 사이를 잇는 연줄을 더듬어갈 때, 그녀는 사람으로서는 오인되어서는 안 될, 두 마리 늑대들 사이의 형제애와도 같은 격정적인 정서를 창안해 내는 것이다. 프루스트가 그토록 꼼꼼하게 질투를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는 견해에 의해 전제된 감정상의 질서를 끊임없이 전복시키는 하나의 정서를 창출해 낸다. 견해에 의한다면 질투란 사랑에 있어서의 불행한 결과 중의 하나여야 하겠지만, 프루스트에 있어서는 반대가 질투의 궁극점이요 지향점인 까닭에, 만일 사랑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질투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세상에서는 조각에서 실물과 꼭 같이 만들려는 사람이 있다. 특히 금속으로 만든 경우 실로 교묘히 실물과 닮도록 만든다. 예컨대 새우와 게의 경우 그 발이 움직이도록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암만 실물 그대로 만들어져 있을지라도 실물과는 거리가 멀다. 실물을 만들 때는 실물의 구애를 받아서는 안 된다. 실물과 비슷해지려고 하면 실은 그대로의 조형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장남감이 되고 만다. 조각은 매미를 만들지라도 일단 매미에서 떠나서 다른 입장에 서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서 비로소 매미가 모사도 아니고 장난감도 아니며 진실로 매미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얼굴이라도 그 사람을 그대로 베끼듯이 하면 조각이 안 된다. 다만 그 사람 비슷한 것이 된다. 그와 비슷한 것, 그의 그림자 같은 것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은 되지 않는다. 실물의 그림자 같은 것, 거품 같은 것을 포착하고 그게 조각이라고 좋아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그런 것은 조각이라 할 수 없다.

 

조각은 진실로 이루어지면 그 사람 이상으로 그 사람이 된다. 매미 이상으로 매미, 돌 이상으로 돌이 된다. 실물과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실물이상으로 그 실물이 된다. 이것이 조형 예술의 묘미이다.